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故 심일소령 공적진위 확인-31

지난달

안태석(7연대 8중대 화기소대장) 2

두 번째 증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안태석이 거주하고 있던 춘천의 강원도 반공연맹지부안보회관에서 실시되었다.

세부 증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계상태는?) 12중대 LMG(경기관총) 소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평골에는 민가가 10동 가량 있었으며, 소대는 민가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2대대의 전방중대도 마찬가지로 민가에 유숙하면서, 거점의 경계초소에 병력을 순환배치 소극적으로 경계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아침에 초소에 올라가 확인할 정도의 경계이었다. 진지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그러나 유개호는 있었다. 부용산 초소에 올라갔을 때는 유개호도 없었다. 주요 접근로에는 대인지뢰가 설치되어, 산돼지 등 짐승들이 죽는 일도 있었다. (적의 작전기도는?) 잘 모른다. 북괴 김일성이는 25일 1200시까지 춘천시를 점령하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적 돌파 상황은?) 적이 설마 남침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6.24일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평상시와 같이 외출외박을 실시하였다. 우리 소대는 ½은 춘천으로 외박을 실시하였다. 6․25 0400시에 지금까지 낙하된바 없는 큰 포탄(122미리 포탄)이 배치고개, 부용산, 청평골 일대에 비가 오듯이 낙하되었다. 적 포화의 강타로 우리 소대는 18명중(외박 실시후 잔유병력) 7명이나 전사 했다. 1시간 후 적 □병이 배치고개를 넘어 새까맣게, 벌떼처럼 내려왔다. 상황이 위급하여 모든 보급품과 탄약을 포기한 채 부락민과 같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포탄속을 뚫고, 급히 샘밭으로 철수했다. 철수상황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지휘관 명령없이, 각개 분산, 46번 도로를 따라, 우두산으로 향하였다. 5,6,7중대도 철수하고 있었다. 이때가 25일 1200시경이었다. 부상자를 가마니 들것에 싣고, 매고 오는 병사, 전우들의 부축아래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병사 등 아비규환의 상태였다. 부상자는 도착하는데로 춘천 도립병원으로 후송조치하고, 나머지는 재편성을 했다. 춘천시민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봉이산, 소양강 뚝 에 많이 나와서 구경들을 하고 있었다. 적이 정말 남침을 해온 것을 실감치 못하고, 피난준비도 하지 않았다. 또한 시민들은 아군이 승리 할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보병을 앞세운 적은 전차 5대와 보전협동으로 부창(CT9900)으로부터 46번도로 밀려 내려왔으며, 화천으로부터 5번 도로에도 전차 10대가 보병과 같이 옥산포로 밀려왔다. 재편성을 완료한 2대대는 김종수 대대장 지휘하에 현 2군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샘밭을 목표로 공격 육박전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중과부적인 아군은 26일 0800에 소양교를 건너 철수, 소양교를 중심으로 우측은 2대대(9중대 포함)가, 좌측에는 1대대가 점령 방어에 착수했다."

"(7연대 1대대 전투 상황은?) 연대 예비로 있던 1대대는 25일 0700시에 금광터(164고지 전방) 벌판(본명은 용산리 벌판이라고 진술)에서 □□에서 밀려오는 적을 저지하고자 노력했으나 26일 0800시에 2대대와 같이 철수, 소양강교를 건너, 소양교 좌측을 담당하였다. (심일 대전차포 소대장이 전차를 어떻게 파괴했는가?) 7연대는 대전차포 4대를 장비하고 있는 중, 2문은 고장, 2문만 가지고 옥산포로 출동했다. 옥산포에서 전차와 대항하다가 철수중 현 201연대 주둔지에서 1문 진흙속에 빠져 1문만 가지고 소양교 이남으로 철수했다. 현 춘천 제사공장으로부터 전차 7대, 현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전차 5대가 소양교 3거리를 몰려와 도강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김성소령이 지휘하는 16포병대대는 봉이산 뒤에서 포문을 열고 불을 품었다. Cal 50은 범바위에서 병력들은 강둑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었다. 26일 2100시경 심일 소대장이 본명에게 “포1문밖에 없어 이제 우리는 죽었다. 마지막이다. 안소위 Cal50으로 엄호사격 해달라, 내가 전차를 공격하겠다”말하고 사격준비를 완료했다. 그러나 1번 전차가 삼거리에서 소양교를 넘기위해 진입하자, 57미리 대전차포는 기다렸다는 듯이 좌측 카타빌라(적 전차가 춘천시를 향해서)를 명중시켜, 전차가 좌로 비스듬이 정지, 도로를 완전히 가로막게 되었다. 뒤따라오던 잔여전차는 전부 정지하고 말았다. 8중대는 Cal50 8정을 장비하고 있던 중 4정은 고장, 4정만으로 강북□에 있는 전차와 보병에게 강타를 가했다. 본명은 교육대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Cal 50지휘를 잘했다. 적은 파괴된 전차를 남겨놓고 뒤로 철수하더니 도로가에 일정한 간격으로 전차포를 방 열 봉이산의 아군 진지를 맹타하기 시작했다."

"(소양교를 왜 파괴하지 않았는가?) 다리를 끊기 위해서 가마니에 다이너마이트와 모래를 썩어 다리위에 50개쯤 설치해 놓았는데 왜 끊지 않았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1대대가 26일 야간에 옥산포의 적을 공격했는가?) 현재 새로 놓은 다리 있는 곳은 물의 깊이가 사람 가슴 정도 닿았다. 1대대는 16일 저녁 이곳 여울을 건너 옥산포와 금산(옥산포 서쪽마을)을 반격했다. 이때 우리소대도 강북안의 뚝에 배치된 적을 공격, 살육전을 전개했다. 우리소대는 서북청년들로써 아주 전투를 잘했다. 피아간에 혼성되어 머리가 짧은자만 골라 대검으로 찔러죽이었다. 30분 가량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한 후 범바위로 철수했으나 이상사(성명미상)가 복부 관통상으로 전사했다. 이상사는 평안도 정주사람인데 ‘소대장님,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19연대가 전투에 투입되었는가?) 27일 1200시경에 19연대가 기차로 춘천역에 도착, 금산에 배치 서상리를 공격 격전했다. (춘천시가전은?) 시가전은 하지 못하고 석사리로 철수했다. 28일 낮에 춘천에 들어온 적은 중앙로에 있는 중소기업은행을 제일먼저 불태우고, 적 전차는 중앙로 로타리에 버티고 서서 사방으로 포를 발사했다. 이때부터 시민이 피난하기 시작했다. (춘천시민협조는?) 춘천□□학교 학생 등 핵생들이 동원되어 진지 작업을 했고, 소양강 전투시에는 남천천 탄약고로부터 탄약을 운반하고, 부녀자들은 밥을 지어 주었다. 춘천시 철수시에는 삼천리 탄약고로부터 12대분의 탄약을 석사리 사범학교 강당으로 옮겼다. 9.28 수복 후 이곳을 방문하니 탄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포로가 된 경위는?) 1950.10.30. 아군이 초산으로 진격시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잠입하여 아군의 북진상황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중공군은 아군이 초산에 입성 후 청천강까지, 깊숙이 5선 포위망을 형성해 놓았다. 1950.10.30.,1500경 초산에서 미군 수송기에 의해서 탄약, 휘발유, C레이션 등을 낙하산으로 보급받았다. 우리 연대는 고장(초산부근)에 집결해 있을 때,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음을 인지하고 지휘관 및 참모회의를 거쳐 포위대책을 토론했다. 북괴군으로부터 노획한 300대의 차량으로 포위망을 뚫자는 안과 미군수송기에 의해서 보급받은 보급품을 개인 분배 휴대 각개약진, 산악을 이용 철수하자는 안이 대두되었다. 연대장은 일안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그날 저녁 1800시에 1대대, 3대대, 2대대 순으로 출발, 풍장을 지날 무렵, 처음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 3개 사단이 길 양 능선 고지군에 배치, 나팔과 피리를 불면서 공격해 왔다. 아군은 중공군이 수백만으로 보였다. 그날 저녁 2300시경 자동차는 휘발류 탱크에 수류탄을 넣어 폭파시키고, 각개 분산, 산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이 전투에서 7연대 2,000여 병력 중에서 1,200명 가량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11월 1일 본명은 홍성된 50명의 병력을 데리고, 강남산맥 1,650m 고지를 올라가다가 낙오병 70과 합류 120명 가량되었다. 회목동-정수동-극성-광상동까지 도망했다. 800명 가량의 아군이 이곳으로 도망해 왔다. 1대대장 김용배 소령, 2대대장 김종수 소령, 참모들도 들어있었다. 800명 중 100명 가량이 개인화기를 소지했을 뿐이며, 반수이상이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중공군 마지막 제5선 포위망을 뚫기 위하여 광상동을 출발 청천강으로 향하였다. 무기를 휴대한 병력을 전위, 중위, 후위로 편성했다. 아군은 드디어 11월 5일 청천강 북쪽 묘향산 근처 무명고지에 도달했다. 산밑에 수천대의 중공군 차량 대열이 남하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청천강만 건너면 살수있다는 유일한 희망아래 11월 6일 0400시 막 도하하려고 할 때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 때 본명은 심일 소위를 만나 민가에서 식사중 중공군 2명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2km쯤 도망했을 때 심일 소위가 하퇴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심 소위는 “나는 더 살 수 없음으로 너는 빨리 도주 복수를 해달라”하고 숨을 거두었다. 본명은 계속 도주했으나 중공군의 총을 맞고 부상 포로가 되고 말았다. 집결지에는 7연대 포로를 포함하여 150명 정도 연행 되어왔다. 중공군은 눈이 오는 데도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고 손을 새끼줄로 결박하는 등 잔인하게 굴었다. 낮에는 계곡에 숨기고 밤에는 죽음의 행진이 강요되었다. 보행할 수 없는 포로는 사살 유기했다. 보행이 가능한 자만 압록강 벽동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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