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故 심일소령 공적진위 확인-39

지난달

김종수(제7연대 2대대장)

김종수는 1950년 6월 25일 당시 7연대 2대대장으로 보직되어 있었다. 그는 1977년 4월 12일 증언 청취에 임했다. 세부 면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지공사는?) 6.25전쟁 전년 가을에 담당정면인 양구로 들어가는 길과 화천으로 들어가는 길 사이를 우리 2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진지공사를 사단에 건의하였던 바 예산관계로 자체에서 해보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에 중점을 두고 공사하였다. 즉 오음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어항이라는 곳이다. 이 때 춘천고생들을 동원하였고 도에서는 시민의 협조도 있었다. 콘크리트진지는 대대지역에 2동인가 구축했다. (보수교육은?) 내가 처음 6.25전쟁 나던 해 4월에 OAC를 졸업했고 연대장도 이때 나왔다. 그러나 타 장교들은 나오지 못한 것으로 안다. 이때 보병학교 교장은 민기식 장군이었다."

"(역습계획은 있었다고 보는가? 있었다면 연습은?) 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전투 간 소양강 남안의 천일에서 그리고 원창고개에서 했으나 소규모였다. 전사에 실을 정도는 아니다. (적이 기습적으로 남침하리라고 대대장으로서 생각하였는가?) 나는 했다. 왜냐하면 6.25전쟁 1주일 전만 하여도 차량이동이 그리 없었는데 4, 5일전부터는 주야로 병력과 포가 무수한 차량에 의해서 남하하였고 3일전부터는 38선 바로 북쪽 능선 밑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관측하였다. 이 같은 급작스런 변동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2일전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접한 사단장은 육본에 보고하는 한편, 전 예하연대에게는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명령하였다. 다른 부대에서는 농번기 모심기 휴가를 실시하였으나 우리는 연대장 이하 대대장 회의에서 일체 휴가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38선에서 하루를 이겨냈다고 보며 소양강전투도 훌륭했다고 자부한다."

"(천전리에서의 전투상황은?) 이 전투는 소양강 남안에 포진하고 적의 도보를 저지하였는데 제5중대장 김상홍 대위는 밤에 천전으로 들어가 적의 집결지라든가 도강준비하고 있는 부대를 기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때 대대OP는 봉의산에 있었다. (소양강교의 폭파를 놓고 시비가 많았다는데?) 이것을 끊느냐 안 끊느냐를 놓고 간부들이 검토하였는데 끊지 않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시 북진을 하여야 하는데 끊을 경우에는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적 전차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교량 위에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밤에 고장 난 GMC를 소리 내지 않고 살살 밀어 넣고 불 질렀다."

"(전투간 급식 및 탄약보급관계는?) 급식은 자체 해결했다. 보급을 제대로 받은 것은 충주선 부터이다. 그것도 주먹밥에 소금 적신 것, 김밥 등인데 전투 간에는 그것마저 힘들었다. 탄약은 충분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받은 기억이 난다. (57㎜대전차포의 지원은?) 천전북안에서는 없었으나 남안에서부터 1개 포대가 지원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맞아도 반응이 없었고 심일 소위는 쏴도 안 되니까 부딪쳐서 깼다.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다. 아마 대전차포 소대장으로 안다. 도망가지 바쁜 때에 전차하고 들이받았으니 얼마나 용감한가. (포지원은?) 없었다. 문경전투때 처음 지원 받았고 맨주먹으로 싸웠다."

"(원창고개 전투상황은?) 28일 새벽에 춘천을 철수하여 원창고개에서 별명이 있을 때까지 주력 철수를 엄호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이날 이곳에 배치하였다. 원창고개의 북쪽은 나무 하나 없는 곳인데 다음날 29일 날이 새면서부터 적 1개 대대 규모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여 전투가 개시되었다. 그런데 5중대장 김일홍 대위로부터 ‘적이 백기를 흔들고 있다’라는 보고를 받고 앞으로 나가 보니까 큰 백기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항복하려는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사격을 중지하였다. 전 대원이 양손을 들고 빨리 올라오라고 하였는데 고지에 올라서자마자 그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정상에서는 순간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나도 한 명과 맞붙어 뒹굴다 이를 사살하고 겨우 부대를 수습하여 철수하였다. 완전히 그들에게 속았다. 이 사실을 연대장에게 보고하여 육군본부에서는 이와 같은 기만책에 속지 말도록 전군에 하달한 바도 있다. 그러나 큰 희생은 없었고 그 병력으로 낙동강선까지 갔다. (병력손실 관계는?) 춘천 남안에 이르렀을 때 80% 병력을 유지하였고, 원주 철수시는 70%였다. (6.25전쟁 초전에 있어서의 전투력은?) 한마디로 강한 정신력에 의하여 서전을 장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장비라고는 M1, CAL, 박격포, 기관총이 주무기였는데도 이를 막아냈던 것이다.”

김종수의 증언내용 중 의미있는 부분은 ‘심일이 부딪쳐서 깼다’라는 것이다. 이 증언이 육탄돌격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육탄돌격을 의미한다면, 이미 조작으로 판명 난 육탄돌격을 언급한 것은 그의 증언이 신빙성이 떨어짐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2대대장으로 보직되어 있던 김종수의 위치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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