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100]중경삼림

2개월 전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경험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생각들이 있고, 실제로 검증하기 위한 실험, 가설들이 따른다. 그렇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아낸다고 해도 의미는 없다. 이미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지 않게 된 원인을 찾는다고 변할 건 없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은 패배자의 말이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모든 사랑에 유통기한을 부여해야 하는 패배자의 처절함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어떤 영원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Till death do us part"할 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패배자들은 그걸 보고도 그것조차도 '영원'하지 않다며 자신과 동격으로 끌어내려야 속이 풀리는 것이다.
 그 발악을 나무랄 수는 없다. 실연은 가족의 죽음과 비슷하거나 때로는 그 이상의 정신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리고 그런 정도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광기에 가까운 무언가가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경삼림의 두 남자가 그렇다. 둘은 모두 경찰이고, 실연을 겪었다. 둘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미쳐간다. 하나는 시간에, 하나는 공간에 매달린 인연을 상징한다. 둘 모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매일같이 방문하고, 거기에는 항상 젊은 여자 점원이 있지만 223이 정한 기한이 되기 하루 전에 떠나고, 663의 경우에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자신의 공간이 될 때까지 페이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첫 이야기의 남자, 223은 모든 것에 유통기한이 있는 현실을 한탄하며 기억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고 한다. 관계는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납득하고 5월1일로 기한까지 두었지만, 기억은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나 이별을 겪은 직후에는, 그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상대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자신을 밀어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의 기한은 5월1일로 두더라도 기억만큼은 영원하길 바란 것이다.
 통조림이 유통기한이 되기 전에 다 먹어버린 건, 능동적인 행동을 뜻한다. 유통기한을 기다리는 건 수동적이다. 그는 5월1일을 기다리는 대신, 4월30일에 바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게 만난 금발 가발을 쓴 여자도 실연을 겪고, 사람은 변한다며 이해의 무용을 말한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만취해서 함께 호텔로 가지만 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식욕을, 여자는 수면욕을 충족시키는 시간을 보냈을 뿐. 하지만 그 날, 둘은 무언가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과정이야 어떻건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이 아니라 공간의 차례다. 223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점원 페이를 스쳐 지나가고 6시간 후 663이 들어온다. 223은 정해진 시간까지 기억을 견뎌야 했다면, 마찬가지로 실연을 겪은 경찰 663은 공간에 남은 흔적을 견뎌야 했다. 663과 페이의 관계는 이상하다. 아마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페이에게도 특이한 상처가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페이는 663의 전 연인으로부터의 편지를 훔쳐보고, 거기에 든 열쇠를 가지고, 663의 집에서 옛 연인의 흔적을 치우는 작업을 한다. 단순히 치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괴상한 과정을 통해 663은 전 연인의 그림자에서 해방된다. 그 사실을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고,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페이는 편지를 두고 떠난다.
 그 편지는 항공권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조차도 전 연인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다. 전 연인은 취소되었다는 도장이 찍힌 항공권으로 이별을 알렸다. 또 편지. 663은 편지를 버리고, 곧 되찾지만 젖어서 장소에 대한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 공간이 문제다. 알 수 없으니 갈 수 없었다. 아마 이번에야 말로 바 캘리포니아에서 보자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페이는 스튜어디스 제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으로 이제 663이 아니게 된 그를 한번 더 해방한다. 그들은 이제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간다.

 두 가지 인연 모두 평범하지 않다. 223이 만난 여인은 마약 밀수, 납치, 살인까지 저지르는 범죄자고, 페이는 우연히 얻게 된 열쇠를 활용해서 663의 집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스토커와 같은 행동을 한다. 심지어 잘 흘러갈 것 같지도 않다. 살인을 하고 자리를 떠난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도저히 예측할 수 없게 제멋대로 구는 페이와 안정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을까?
 왕가위는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 같다. 모든 인연은 운명적이다. 그 순간, 그 공간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 인연이다. 223에게 5월1일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없었다면 4월30일에 바를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5월1일에 대한 집착을 끝까지 지켜냈더라도 4월30일에 그 바에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페이도 평범하게 굴었다면 663에게서 전 연인의 흔적을 걷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663이 자신의 공간에 침투한 페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663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폐업을 보고만 있었다면 페이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모든 건 우연이다. 우연은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운명이기도 하다. 거창한 만남만이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있다면 언제든 어디든. 그렇게 패배자들은 다시 영원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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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실패자들의 상실감이라고 생각한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추억도 다른 만남을 통해서야 정리되어 기억의 서랍속에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좋은 영화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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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