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싸이코(1960)

지난달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의 가을'을 장식할 '20세기 영화제'가 10월부터 열린다. 앞의 문장에서 20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시피 20세기 소년에게 '20'은 의미 있는 숫자다.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위해 모두 2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정 기준은 전적으로 20세기 소년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디 영화사 책에서 뽑혀져 나온 리스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20세기에 생물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성장을 거쳐온 '나, 최광희'라는 인물의 개인사적 목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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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는 너무나 유명해서, 또한 영화사의 교과서적 작품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다른’ 접근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 가장 일반적인 접근은 스릴러, 또는 슬래셔 호러의 태동이라는 장르적 문법으로 이 영화를 독해하는 것인데, 그래서 영화 중반에 나오는 샤워실 살인신은 지겹도록 자주 인용되어 왔다. 또한 반전 효과에 집중하느라 사이코 살인마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이야기들도 수만 번 언급됐으리라. 버나드 허먼의 음악이 어떻게 내러티브와 교묘하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나 스스로 강의 때 많이 했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온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인색하다. 그녀가 영화 중반의 살인으로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한데, 주인공이 중간에 죽어 버리는 이 엉뚱한 전개 때문에 사이코에게 이야기의 바통을 넘겨준 그녀의 서사가 주체성을 얻지 못한 채 슬쩍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건 온당치 않다. 왜냐면 이 영화는 한 미치광이의 잔혹극이 아니라 마리온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돈의 논리를 동원해 사랑의 문제에 대한 극단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라고, 영화의 정체를 전제하고 접근해 보도록 하자.

영화가 제시하는 디제시스(창의적 허구)에 빠져들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주의력이 아주 신속하고도 정확하지 않다면 놓쳐버리기 십상이지만, 마리온이 현금 4만 달러를 훔쳐 달아나기로 한 동기는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 안에 다 나온다. 그 10분 동안 그녀가 어떤 결핍을 가진 인물인지 명시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이 대목을 부주의하게 본다면 영화 ‘사이코’의 중심 서사 하나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영화의 첫 장면, 애리조나 피닉스시의 마천루를 비추던 카메라는 천천히 한 호텔방으로 다가간다. 이제 막 정사를 끝낸 젊은 남녀가 침대 위에서 뒹굴며 약간의 낭만적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천천히 옷을 걸치면서 그들은 현실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마리온은 가끔씩 출장차 피닉스에 와 자신을 만나는 남자 샘과 호텔에서 뒹구는 생활은 이제 그만 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샘과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 그러나 샘은 이혼한 전처에게 주어야 하는 위자료 걱정을 한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마리온과의 결혼은 언감생심이다. 마리온을 사랑하니 어떤 방식으로 만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게 샘의 입장이다. 결국 돈 문제가 두 사람의 갈등 요인이다.

부동산 중개업 사무실로 돌아온 마리온 앞에 사장과 중년 남자가 나타난다. 호기로운 표정의 남자는 마리온에게 이런저런 너스레를 떨며 뻔한 수작을 건다. 자본주의에 적응한 수컷들이 여성들 앞에서 위세를 떠는 방식은 으레 돈 자랑이다.

“불행할 때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아실까? 돈으로 쫒아 버리지. 당신도...불행하오?”

만약 당신이 불행하다면 내 돈의 품에 안기라는 유혹이다. 그리고는 그가 자신의 딸 결혼 선물로 사주기로 했다는 집값으로 현금 4만달러를 거침 없이 내놓는다. 능글맞은 부자 남자는 마리온에게 다시 강조한다.

“행복을 산다기보다는 그저 불행을 쫒아내는 거지.”

빙고. 좋은 팁이다. 내 불행을 쫓아내기 위해 네 돈을 훔쳐주지. 이 대목에서 마리온은 이미 눈앞의 4만 달러를 가로채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 돈을 은행에 입금하라는 사장의 지시에 은행에 갔다가 곧바로 퇴근해도 되겠냐고 물은 걸 봐서 말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결단력이다. 마리온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4만 달러의 주인이 되는 범죄자의 길을 선택한다. 이 대목은 그녀가 그동안 돈에 대한 갈구가 상당히 컸다는 걸 반증한다. 첫 장면에서 결혼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고, 다음 장면에서 단지 불행을 쫒아내기 위해 “잃어버려도 좋을만큼의 현금만 가지고 다닌다”고 허세를 떠는 재수 없는 부자가 그녀의 잠재된 욕망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린 것이다. 준비가 돼 있다면 바로 실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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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돈을 슬쩍 하는 건 죄책감을 상쇄시킨다. 법은 그걸 재산범죄로 규정하지만 마리온의 경우 돈은 필요한 사람에게 위치 이동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그녀가 고속도로를 내달릴 때, 운전석에 앉아 피닉스에서 벌어졌을 상황을 상상할 때, 분해서 치를 떠는 부자의 모습이 유추되는 대목에서 잔뜩 긴장해 있던 그녀의 표정에 일순간 묘한 미소가 번진다. 마리온은 돈으로 치장한 채 자신을 모욕한 늙은 수컷에게 한방 제대로 먹인 통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마리온은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 샤워실 살해 장면의 피해자로 갑자기 전락하며 러닝 타임 절반 지점부터 사라진다. 마리온의 서사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 없는 중단이다. 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마리온 서사의 중단을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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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논리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구현할 방법을 훔쳐낸 마리온은 순식간에 결산을 당한다. 아다시피 예기치 않게 그녀의 길에 싸이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싸이코는 경제 논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세계에 속한, 즉 마리온처럼 물리적인 결핍을 편법적으로 충족하려는 세계의 인물이 아니다. 대신 그는 억압의 아이콘이다. 가상의 어머니 인격을 빌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스스로 억압한다. 어머니로 변장한 그가 마리온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건 죄책감에 휩싸인 자기자신을 대신해 희생양을 파괴하는 행위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 억세게 운 나쁘게도 노먼 베이츠의 호텔로 걸어들어간 마리온은, 돈을 훔친 죄가 아니라 매혹적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서사를 이어갈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어처구니 없게도, 마리온의 진짜 적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경찰(제도)이 아니라, 갈피 잃은 타인의 영혼(뒤틀린 욕망)이었던 것이다. 부자의 재화를 훔쳐내 결혼이라는 제도 자본을 획득하려는 마리온의 세속적 욕망은 어머니와의 유사성애적 관계에 포박된, 즉 제도를 뛰어 넘는, 제도의 기준으로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인간의 근원적 결핍의 힘에 의해 산화되어 버린 것이다. 돈은 그녀가 느닷없이 맞닥뜨린 전혀 다른 차원의 욕망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호텔 거실에서 저녁을 때우는 마리온에게 노먼 베이츠가 던지는 말은 마치 곧 이어질 비극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람은 그 어떤 것에서도 도망칠 수 없어요. 우린 모두 각자의 덫에 걸려 있는 것 같아요. 갇혀 있는 거죠.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알프레드 히치콕의 정의에 따르면 영화의 서스펜스는 관객은 아는데 등장 인물만 모르는 상황이 전개될 때 생긴다. 이를테면 마리온이 샤워를 할때 그녀 몰래 천천히 다가오는 노파의 그림자를 관객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노먼 베이츠의 통찰대로, 우리는 각자의 덫에 걸려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꾸 현실적 서스펜스, 즉 불안에 빠진다. 결산은 바로 그럴 때 이루어진다. 불안이 증폭돼 질적 전환의 순간을 맞을 때.

마리온은 노먼 베이츠와의 짧지만 이상한 대화를 정리하며 이렇게 말한다.

“피닉스로 돌아가야겠어요. 거기서 덫에 걸렸는데 돌아가서 어떻게든 스스로 빠져나와야죠.”

이 대사를 곱씹어보면 마리온은 그녀의 욕망 추구 노선을 갑자기 변경했기 때문에 응징을 당한 것이라고 볼 여지를 남긴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면 빠져나오려는 생각을 말았어야 했다. 어떤 덫은 황홀하기도 해서 나중에 뭐가 남을지 의문부호로 남긴 채 끝까지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덫에 걸린 다리를 절뚝 대면서라도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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