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

29일 전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의 가을'을 장식할 '20세기 영화제'가 10월부터 열린다. 앞의 문장에서 20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시피 20세기 소년에게 '20'은 의미 있는 숫자다.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위해 모두 2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정 기준은 전적으로 20세기 소년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디 영화사 책에서 뽑혀져 나온 리스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20세기에 생물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성장을 거쳐온 '나, 최광희'라는 인물의 개인사적 목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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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사랑은 영화의 단골 소재다. 영화가 사랑을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가 그것이다. 두 장르의 차이를 최대한 간단히 말하면, 멜로는 이별을 다루고 로맨틱 코미디는 만남을 다룬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별하면 멜로가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줄 몰랐던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키스를 나누면 로맨틱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이별만큼이나 사랑을 확인하게 되기까지의 상황도 괴롭긴 마찬가지인데, 왜 그게 ‘코미디’의 범주에 속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사랑이 만들어지는 상황을 보는 건 사람들한테 행복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비극보다는 희극 쪽으로 범주화했다고 짐작할 수는 있겠다.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도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웃기보다는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벡스터의 짝사랑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사랑이란 대개 부조리해서 슬프다. 사랑을 칭송하는 시와 노래가 넘쳐나지만 조장된 낭만을 한꺼풀 벗겨내고 차갑게 바라보면 사랑은 부조리하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매개로 한 감정이라 그렇다. 관계의 두 항, 그러니까 남과 여는 각자의 사회적 관계 안에 있다. 이 대목이 늘 숙명적인 문제다. 관계라는 단어가 나오면 곧바로 정치라는 단어가 끌려 나온다. 남녀간의 에로틱한 사랑에도 정치는 있는 것이니, 그것 때문에 많은 남녀가 힘들어한다. 정치에 능수능란한 이는 연애 정치에서 국면적 승리를 거둔다. 반대로 누군가 정치적 술수 없이 ‘이데아적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는 대개 패배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사랑을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데 동의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에서 사랑은 태고적부터 있었을 것이다. 서로 좋아하고 품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남녀간의 사랑도 태고적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만 문명 이후 결혼이 생겼고, 경제적 결합인 결혼과 감정의 문제인 사랑이 별도의 개념이었다가, 결혼의 신성시를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입시키는 근대로 넘어왔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게 상식처럼 되었다. 연애 결혼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다 알지만 여전히 쉽게 발설하지 않는 진실은,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더 부연하지 않도록 하자. 결혼과 사랑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 빼고는.

영화의 주인공 벡스터가 자신의 아파트를 회사 중역들의 불륜 장소로 제공하는 것 역시 앞선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때문에, 승진에 대한 은밀한 약속에 혹 해서 자신의 거처를 바람둥이 유부남 중역들이 마음껏 젊은 여자를 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주었지만 그는 인간사가 다 그렇다는 것쯤은 안다. 이들은 가진 게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과 사랑의 별도의 개념이라는 걸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그러나 전제는 있다. 이 ‘사랑’이 제도에 안착한 자신의 안정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하여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저 놀이일 뿐이다.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내주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다 지키면서 하는 사랑은 그저 찰나적인 유희일 뿐이다.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다운 사랑을 하는 이는, 유사 사랑으로 결혼의 잔혹함을 잠시나마 망각하려는 이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하는 벡스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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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파트를 빌려 사랑 놀음을 하는 임원의 정부 가운데 벡스터가 늘 흠모해 마지 않던 엘리베이터 직원 프랜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순식간에 패닉에 빠뜨린다. 대개의 수컷은 이 지점에서 질투심에 치를 떨겠지만, 하필 자신의 아파트에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프랜을 발견한 벡스터는 ‘인간의 사랑’을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오로지, 사랑하는 프랜을 위해서. 그녀가 알든 모르든, 오로지 그녀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 어떤 정치적 계산도 그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랜은 벡스터에게 연민을 보내며 말하는 것이다. “바보, 당신은 정말 바보예요.”

인간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태고적부터 있어왔지만 늘 훼손돼 왔던, 그러나 늘 다시 묻게 만드는 인간의 사랑. 나는 그것의 정체를 이 영화를 통해 확인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사랑론이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 벡스터를 묘사하고 있는 문장 같아 여기 옮긴다.

“도대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온전함을,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서나 나르시즘에 따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조금도 모자람이나 미련 없이 완벽하게 뭔가를 줄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는 행위 자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받아들여지고', 전달 통로를 제대로 찾아냄으로써 그 대가로 가슴 속 깊이 희구하던 상대방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말해 사랑받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환의 자유로운 '주체'와 '객체'가 되려면 뭐랄까 그 교환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준 것과 똑같은 선물, 또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대가(계산적인 유용성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대가)로 받고 싶을 경우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그리고 명백히 자기 존재의 자유에 한계가 주어져서는 안 되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는 것, 즉 '거세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기 존재의 총력(스피노자를 생각하자)을 단 한 부분도 잃지 않고, 또 착각이나 허공 속에서 자기 존재를 보상받을 필요도 없이, 그 총력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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