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하녀(1960)

지난달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의 가을'을 장식할 '20세기 영화제'가 10월부터 열린다. 앞의 문장에서 20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시피 20세기 소년에게 '20'은 의미 있는 숫자다.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위해 모두 2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정 기준은 전적으로 20세기 소년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디 영화사 책에서 뽑혀져 나온 리스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20세기에 생물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성장을 거쳐온 '나, 최광희'라는 인물의 개인사적 목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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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기록된 세계 영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변방의 영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의 로컬리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의 시대상을 읽어내는 텍스트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미국을 중심에 둔 전후 자본주의 질서가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의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20세기의 한국은 압축 성장을 거쳤다. ‘압축’의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버렸다.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로 세울지에 대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국 현대사에선 그게 빠졌다. 논의를 생략한 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하향식 강박에 사로 잡힌 성장 과정이 이를테면 ‘개발 독재’다. 어쩌면 폭압적이기까지 했던 개발 독재의 과정은 자생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전후 세계 질서의 수동적 주변부로 자리잡은 한국이 거쳐야만 했던 역사적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로 인해 많은 소외가 양산됐음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그 소외마저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 ‘하녀’가 내 ‘20세기 영화 20’ 목록 안에 뽑혀져 나온 것은, 이 영화 속에 내 정체성의 근거가 된 사회적 변화의 중요한 실마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란 개인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영화에는 전라남도 담양 출신의 내 어머니와 강원도 춘천 출신의 내 아버지가 서울의 변두리로 흘러 들어와 도시 빈민층에 속하게 된 과정에서 겪었을 아득한 두려움이 들어 있다. 또한 가난한 집안 식구들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을 등진 채 일찌감치 척박한 사회로 떠밀려 나갔던 내 누이들의 상실감도 스며있다. 생일 잔치를 한다고 해 놀러간 같은 반 친구의 집이 넓고 쾌적한 2층집이었을 때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보던 나의 상대적 박탈감도 이 영화에는 있다.

초등학교 때 우리집은 거리로 향한 쪽문을 열면 바로 시멘트를 대충 발라 만든 부엌이 나오는 구조였다. 거의 평생 실업자로 사셨던 아버지는 한복 만드는 일을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가사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어느날 나는 쪽문을 활짝 열고 집에 들어서다가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이 노무 자식, 문 빨리 안 닫아?” 아버지는 자신이 설거지하고 있는 모습을 거리의 행인들이 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거주 형태와 집의 규모는 이렇게 한 사람의 사회적 자존감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물론 지금은 더 강화되었다. 영화 ‘기생충’이 ‘반지하 냄새’로 표상화했듯이.

영화 ‘하녀’가 압축 성장이 야기한 소외의 심리를 표출하는 중요한 매개로 ‘집’이라는 공간을 택한 것은, 따라서 매우 영리한 전략이었다. 주인공 동식(김진규)은 공장의 여직공을 대상으로 취미반 수업을 하는 음악 선생이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경희(엄앵란)가 피아노 개인교습을 받겠다며 그의 집을 방문하는 두 장면이 잇따라 보여지는데, 첫 장면에선 동식의 가족이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풍경이 비춰진다. 경희가 다시 찾아오는 두 번째 장면에서 동식은 넓고 쾌적한 2층집으로 옮긴 뒤다. 앞선 장면의 동식이 대단히 신경질적이고 무뚝뚝하다면, 뒤의 장면에선 자상한 남편이자 너그러운 가장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집이 곧 신분의 표상인 셈이니, 동식의 입장에선 자신의 교양인적 신분에 걸맞는 집으로 옮긴 뒤에야 여직공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Housemaid’이지만 영화의 제목 ‘下女’는 하녀(이은심)가 있어야 할 신분적 위치를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즉, 그녀는 윗층의 중산층 가족을 떠 받들기 위해 ‘아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집에서 하녀의 거처는 1층이 아니라 동식의 피아노가 있는 방 바로 옆의 2층이다. 이 위치를 통해 동식과 하녀의 치정극과 하녀의 신분 상승 욕망은 암시된다. 이미 하녀는 권력 관계에서 이 집의 주인 위치를 상징적으로 차지한 것인데, 그것은 가부장인 동식을 차지해야만 실효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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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녀는 동식이 피아노 교습을 핑계 삼은 경희의 유혹을 뿌리친 다음 장면에 등장해 동식을 겁박한다. 경희는 실패했지만 마치 배구의 시간차 공격처럼 하녀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녀는 동식과 경희의 해프닝을 모두 목격했기에 이제 주도권은 하녀에게 넘어간다. 동식의 취향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경희보다 ‘너는 이제 새 됐어’라고 말하는 듯한 하녀의 전략은 훨씬 더 치명적이다. 동식으로선 경희를 거부하는 건 쉽지만, 자신의 치부를 폭로하겠다는 하녀의 위협 앞에선 무력하다. 그게 바로 두려움이다. 자신이 가진 걸 한꺼번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두려움을 지배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는 점에서 하녀의 전략은 옳았다. 이제부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순식간에 전복된다.

견고한 권력 구조의 철옹성을 향한 하녀의 집요한 반역 시도가 성공하느냐 실패로 귀결되느냐는 스릴러라는 장르적 밀도 안에 있는 논리다. 한편으로, 혹은 더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도시화로 표상되는 압축 성장이 개인들에게 드리운 그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하층민과 여전히 밀착해 있기 때문에 생긴 중산층의 불안 심리를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경희의 유혹을 뿌리친 동식이 바닥에 널부러져 울고 있는 경희에게 기껏 하는 말은 이렇다.

“경희, 앞으로도 피아노를 배우러 와. 식구가 하나 더 느니까 돈이 더 필요해.”

네가 아무리 이 집의 2층을 탐내도 너는 나의 소비자일 뿐이라는 선언이다. 그렇다. 이 국면에서 동식은 승리했다. 그러나 동식은 그 직후 불현듯 나타난 하녀의 선언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하녀의 선언은 이렇다.

“담배 하나 줘요. 이 판에 나도 수지 좀 맞춰야죠. 아주머니한테 일러줄까 보다. 두 사람이 신나게 놀더라고.”

기껏 경희의 유혹을 뿌리친 동식은 위협에 짓눌려 하녀의 침실로 들어가고 만다. 동식의 완패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못 사는 사람들을 게토로 완벽하게 격리시키지 못한 채, 같은 지역, 또는 같은 주거 공간에서 공존하는 상황을 불쾌하고도 두려운 시선으로 보는 중산층의 무의식적 불안증이 1960년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계급 분화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소득 수준에 따라 아예 지역이 분리되고, 지역이 분리되지 않으면 더 높이 올라가는, 유치하게도 침실의 고도를 진짜 하늘 높이 올려 버리는 상승 욕망이 노골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분리의 역사를 소급해 들어가니 이 영화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녀가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의 상징성은 새길만 하다. 그녀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내려오는 동식의 다리를 거머쥐고 천천히 1층으로 ‘끌어내려지며’ 숨을 거둔다. 그녀의 원래 자리(下)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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