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대부(1972)

28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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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게 인생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거의 주저함 없이 ‘대부’ 시리즈를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물론 대부1,2,3 모두 합쳐서다. 세 작품은 시간차가 있지만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다. 그럼에도 내 20세기 영화 목록에서 1편만을 선정한 것은 대부 1편이 시리즈 전체를 대변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2,3편까지 다 합치면 다른 아까운 영화들이 목록에서 빠지게 되니 1편만 목록에 올렸다.

영화 ‘대부’를 누군가는 미국에 사는 이탈리아 깡패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깡패 영화 맞다. 그러나 인간사가 깡패들의 질서와 닮았으니 그로톡 많은 깡패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것일 터, 따지고 보면 히틀러도 간이 부은 깡패였고, 남한의 입장에선 김일성이 깡패였으며 공산화된 베트남의 입장에선 미국이 깡패였다. 그렇게 지구상의 모든 에너지는 자기 이익을 내재한 채 깡패들처럼 충돌하는데, 누구 편이 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거기에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충돌하는 이항(二項)의 갈등과 타협만이 존재할 뿐이다.

위의 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영화 속에 있는데, 대부의 길을 이어받기로 결심한 마이클 꼴레오네(알 파치노)가 오랜 연인 케이(다이앤 키튼)에게 청혼하기 직전의 대화다.

“당신은 아버지를 싫어했잖아요?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버지도 다른 힘있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다른 사람들을 책임지는 의원이나 대통령처럼.”
“아주 순진하게 들려요.”
“왜?”
“의원이나 대통령은 사람들을 안죽여요.”
“누가 순진한지 모르겠군.”

정말? 정치인은 사람을 안죽이는가?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벼랑 끝으로 모는, 결과적으로 살인이나 다름 없는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건 정치인이 아닌가? 광주 시민들을 죽인 건 군인들인가, 전두환인가.

‘대부’는 그런 면에서 시대와 공간을 막론한 보편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명작의 반열에 올릴 것이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서늘한 통찰, 너무 깊어서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어떤 면에선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영화 ‘대부’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 영화는 ‘숙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답할 것이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시칠리아 출신 마피아 돈 꼴레오네(말론 브란도)가 아니라 그의 막내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다. 왜냐면 영화를 관통하는 중심 플롯은, 마이클이 아버지가 속한 마피아들의 질서를 거부하다가 결국 그 세계의 논리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모범생이었지만, 그래서 아버지가 속한 폭력적 세계의 표면을 혐오했지만 아버지의 길을 이어받는 게 자신의 숙명임을 깨닫는다. 그가 이 숙명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앞서 기술한 바대로다. 세계는 자신의 논리를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는 자들의 전쟁터이며,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게 미국의 실질적 논리이며 미국에 둥지를 튼 이탈리아 깡패들이 고스란히 답습한 논리다. 그리고 마이클은 이 논리에 저항할 힘이 없다. 그가 이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항의 에너지를 무위로 만드는 게 숙명이라는 압도적인 에너지다.

물론 마이클은 소박하게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현명한 아내 케이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두둑한 월급 봉투를 가져온 날 저녁에는 아들의 재롱을 보면서 미소 짓는 아빠가 되고 싶었을지도. 그런데 왜 그는 불현듯, 아버지의 저격 소식을 듣자마자 콜레오네 집안의 차기 지도자가 되는 길을 가기로 변심하게 된 것일까.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의 꿈이다. 인생을 즐기는 것도 권고되는 삶의 태도다. 그러나 행복이란 단어는, 한평 고시원 구석에서 언제 붙을지 모르는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는 이에게 노량진 학원가 컵밥의 MSG 맛에서 만족을 누리라는 말처럼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살아남고자 아둥바둥대는 절박한 이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들린다. 물론 지하철의 에듀윌 광고는 말한다. 공시에 붙으면 당신은 행복해진다. 그러나 장담컨대, 내일로 유보된 행복은 내일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지위를 행복과 동일시하는 모든 프로파간다는 그렇게 죽을 때까지 행복을 유보시키는 것이다.

영화 ‘대부’의 세계관은 세상은 승부이며 승부인 이상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 대한 승부인가가 중요하다. 세상은 또한 편리하게도 너 자신과 승부를 펼치라고 기만한다.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이토록 강력한데 기껏 자기 자신과 싸우라니 그것도 거짓말이다. 마라톤의 꼴찌도 자신과 싸운다. 그래봤자 꼴찌라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해서 패자인 자는 없다. 한정된 자산을 놓고 펼치는 상대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패자가 되는 것이다.

영화 ‘대부’의 마이클을 일깨운 건 자신의 아버지가 총알을 여러 방 맞아 병상에 누워 있다는 잔혹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는 이 잔혹한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심한다. 세상이 어차피 전쟁터라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사는 것이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전선(front)을 어떻게 펼치고 그 전선에서 누구와 싸워 이길 것이냐를 결정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하다. 당연하게도, 이 전제에서의 행복은 결국 생존인데, 그건 나를 파괴하려는 적을 파괴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누가 협력자이며 누가 적인지를 구분하는 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협력자를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들고 적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도 결정해야 한다.

사람의 마지막은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것이다. 손자의 뒤를 쫓다가 정원에서 쓰러지는 돈 콜레오네처럼 모든 이들이 각자의 무대에서 내려온다. 대부 3의 마지막에서 마이클도 아버지와 똑같은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한바탕 멋진 전투를 치른 뒤다.

“나는 평생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 일했다. 하지만 거물들의 꼭두각시 놀음에 춤추는 바보가 되는 건 거절했지. 그게 내 그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물학적 수명을 다했다 하더라도 신화를 남겼기에 죽지 않은 것이다. 죽지만 죽지 않는 길이 있다면, 그걸 붙잡는 것이다. 덧없다. 헛되다, 는 뻔한 소리 대신 죽을 힘을 다해 운명을 거스를 힘과 싸워 보는 것이다. 배짱있게. 그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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