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택시 드라이버(1976)

지난달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의 가을'을 장식할 '20세기 영화제'가 10월부터 열린다. 앞의 문장에서 20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시피 20세기 소년에게 '20'은 의미 있는 숫자다.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위해 모두 2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정 기준은 전적으로 20세기 소년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디 영화사 책에서 뽑혀져 나온 리스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20세기에 생물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성장을 거쳐온 '나, 최광희'라는 인물의 개인사적 목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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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우리는 뉴욕의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의 행동에 관한 두 가지 동기를 찾아내야 한다.

그는 왜 대통령 후보 팔렌타인을 저격하려 했는가.
그는 왜 저격에 실패하자마자 10대 소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구원하기 위해 매춘굴에 뛰어들었는가.

첫번째 질문과 관련해 영화는 관객들에게 직접적이거나 상세한 배경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만, 트래비스가 흠모하는 여성 베시(시빌 셰퍼드)가 팔렌타인의 선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트래비스가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흔쾌히 데이트에 응한 베시를 트래비스는 하필 포르노 극장에 데려갔다는 것 정도가 실마리로 제시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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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사실이 팔렌타인을 저격하려 한 강력한 동기가 될까? 일단 우리는 알아야 한다. 베시가 포르노 극장에 자신을 데려간 트레비스를 차단해 버렸다는 것. 즉, 말도 섞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 그러니까 아예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베시는 자신에 대한 트래비스의 호감에 호감을 가졌지만, 그의 데이트 코스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왜 트래비스가 베시를 하필 첫 데이트에 포르노 극장에 데려갔는지, 그 맥락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베시는 트레비스를 사실상 치한 취급해버렸다. 베시는 트레비스의 해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단 하나의 상황을 근거로 그를 악한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인간이 가장 큰 모욕감을 느끼는 순간은 상대조차 할 가치가 없다는 신호를 받을 때다. 트래비스는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여 베시가 순식간에 등을 돌릴 때 트래비스는 독백한다.

“그녀도 차갑고 냉담한 인간들 중 하나였다. 똑같은 심장을 가진 냉혈동물처럼.”

팔렌타인 선거 캠프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We are the peeple”이라는 캐치프레이즈의 어느 단어에 방점을 찍을지 입씨름을 할 정도로 슬로건에 집착한다. 그런데 그들이 주인으로 호출하는 국민 중 한 명, 베트남전 참전 용사 트래비스는 선거 때만 주인으로 떠받들여지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돈 쥐어주면 뭐든지 해야 하는 뉴욕시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그는 모호하게나마 이런 차가운 진실을 자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저격의 동기는 충분하지 않다. 그의 인식 안에서 적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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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가 사라지고 난 뒤 트레비스의 시야에 10대 매춘부 아이리스가 들어온다. 트래비스의 입장에서 이건 아니다. 12살 나이에 몸을 팔다니!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정의감이 돋는다.

이 즈음에 트래비스는 팔렌타인 저격을 음모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곧바로 아이리스가 있는 매춘굴로 쳐들어간다.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펼쳐진다. 앞선 상황과 달리 이 대목은 트래비스에게 모호하지 않다. 눈 앞에 적이 있다. 그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적어도 나보다는 쓰레기들이다. 고매한 언어를 쓰는 높은 애들은 모호한데 입에 “Fuck”을 달고 사는 뒷골목의 애들은 명확하다. 적으로 삼기에 편리하다.

두 가지 시도 모두 트래비스의 입장에선 정의 구현의 행동이다. 그러나 팔렌타인 저격 시도의 동기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대신 아이리스를 구출하러 간 총격전의 동기는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자가 불분명한 이유는 분명하다. 트래비스는 그의 숨이 조용히 멈춰도 아무도 모를 이 외로움의 정체, 그 근원적 모순이 무엇인지 직감했지만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기만의 심장으로 뛰어들어갈만한 이데올로기를 구축하지 못했다. 베시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한 복수심 말고는 트레비스의 증오에는 지성의 힘이 달렸다.

대신 그에겐 실패한 혁명을 자위할 플랜 B가 있었으니 아이리스를 매춘굴에서 구해내는 정의 행위는 그에게 신성한 권력을 안겨준 매그넘 권총과 함께 용감해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겨우 견뎌온 자에게 명분은 멀고 폭력은 가깝다.

이 정의의 제스처 놀이는 “우리는 낙오자야”라고 자조한 동료 택시 기사의 무기력을 비웃을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자족을 트래비스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사실 트래비스의 정의는 자신의 심리적 지위를 높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해야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꽤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잠깐이나마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냉혹한 현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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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이런 자들이 꽤 많다. 정의를 호사스러운 구강 취미로 삼은 자들 말이다. 트래비스와의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정의 사도들 가운데는 자식들에게 온갖 특혜를 줄 수 있을만큼 꽤 많이 가져 놓고 자신이 정의로우니 그 가진 게 정당하다고 우기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폭압적 국가 권력을 향해 돌 깨나 던졌다는 이유 딱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들에게 정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냐가 아니라 그들이 통과한 과거의 한 시절을 박제 삼은 장식품이 되었다.

한국의 유권자가 4천만 명이라면 이 나라에는 4천만 개의 정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뉴스 속 세상이 아니라 내 일상 속의 세상은 좀처럼 정의롭지 않다. 정의를 참칭하는 자들만이 불나방처럼 명멸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했다. 하여 4천만의 트래비스가 매일 정의를 얘기하지만 세상은 어제와 똑같이 쳇바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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