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지옥의 묵시록(1979)

2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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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극단적인 공포에 빠지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심리학자가 아닌 이상 그 행동 유형을 분류할 수까지는 없다. 다만 경험을 근거로 유추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공포의 정체란 모든 생명이 가진 생존 본능이 순식간에 위협을 당하는 순간이라고 전제하자.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맞으면 대개 패닉에 빠질 것이다.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할 게 뻔하다. 그런데 공포가 반복적으로,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서, 개인이 아닌 집단에게 지속된다면? 이때부터 상황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공포에 대비한 집단적 방어기제가 발동할 것이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도무지 속수무책일 때, 인간은 종교를 발명했다. 종교의 정체를 공포와의 상관 관계로 풀어헤친다면 그것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것으로 사료되는 모든 종류의 절대적 힘에 굴종하려는 집단적 경향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 불가해한 자연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여 생산물을 독점한 권력자들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보이는 대리인을 자처했고, 세습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반(半)영구화하며 사회를 지배했다. 이런 기간이 문명이 태동한 이래 인권과 자유, 평등의 개념이 생겨난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근대 이후의 인간은 공포에 합리적으로 대처해 왔는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인 것은, 이 영화가 공포가 인간 본성 또는 사회와 맺는 상관 관계를, 베트남전이라는 미국 현대사의 오명을 급히 불러내 깊이 탐문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반전 메시지를 사실적인 전쟁 스펙터클에 얹혀낸 단순한 휴먼 드라마가 아니다. ‘지옥의 묵시록’이 던지는 뼈 때리는 질문은, 그 한국어 제목이 암시하듯 왜 인간은 나쁜 자들이 죽어서 간다는 지옥을 굳이 자신들의 생존 기간에 만들어내는가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수많은 양민 학살 사건이 입증했듯, 지옥은 나쁜 자들이 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죄 없는 이들이 이유도 모르고 학살당하는 곳이야말로 지옥이다.

20세기의 인류는 지옥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역설적이게도 20세기에 전세계를 무대로 그러한 지옥을 가장 많이 연출한 자칭 ‘정의의 사도’는 미국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범위를 좁혀보면 미국이 미국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질문이 국적성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칸영화제가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까지 안겨주진 않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지옥의 묵시록’은 이 모든 현실 지옥의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는 반성문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합법적(?) 폭력 앞에서 순식간에 문명의 학습 효과를 망각해 버리는 인간 집단 전체의 습성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주인공 윌라드 대위(마틴 쉰)에게 임무가 주어진다. 군 지휘 명령 체계를 이탈해 캄보디아 정글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을 찾아내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에게 임무를 하달하는 최고위 장교는 말한다.

“이 전쟁에선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권력, 이상, 도덕적 가치, 군대의 필요성조차도...항상 선이 이기는 게 아냐. 때로는 링컨이 말한 ‘인간 본성의 천사’를 악이 이기지.”

전쟁의 최고위 지휘부조차 전쟁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할 수 없다. 적이 눈앞에 있으니 섬멸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그들의 성실한 수하였던 커츠 대령이 섬멸 대상이 된 것은 그가 악으로 돌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베트남전을 수행하는 미군의 정신 분열을 명시적으로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 상당한 수의 미군들은 사실상 정신 분열 상태였음에도 대량 살육 이벤트의 결정권자들에게는 그것이 상징성을 갖느냐, 숨겨져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당연하게도, 커츠 대령 같은 이들이 미군의 사기, 또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도덕성에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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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안고 출발한 윌라드는 즉각 커츠 대령의 암시와도 같은 인물을 만난다. 헬리콥터 부대를 이끌고 있는 칼 고어 대령(로버트 듀발)이다. 그는 베트남 민가를 공중 폭격하는 와중에 바그너의 ‘발키리의 기행’을 배경 음악으로 틀고, 전투가 한창인 바닷가에서 사병들에게 서핑을 시키는 기행을 일삼는다. 윌라드의 눈에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킬 고어도 커츠 못지 않은 정신병자에 살인광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런데 왜 커츠만 죽이려 할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조건이 지속되는 한 누구라도 칼 고어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공포를 잊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해 애써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인데, 전투 수행 중에 서핑을 한다는 건 그 극단화된 반응인 것이다. 그러나 킬 고어와 달리 캄보디아 정글에 숨은 커츠는 모든 정신병자와 살인광의 대표로 소환되어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휘 계통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으로선 이 점이 중요하다. 전쟁 상황이 인간성을 얼마나 망쳐 놓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망쳐진 인간성이 여전히 통제 범위 안에 있느냐 없느냐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커츠 대령은 정글 속에 자신만의 ‘공포 왕국’을 조성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그에게 무릎 꿇는다. 커츠 대령은 미국이라는 공포를 본질적으로 대변하는 얼터에고이자 민낯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걸 숨겨야 하는 권력에 의해 제거되어야 했던 것이고.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찾아온 윌라드에게 커츠는 말한다.

“공포는 얼굴이 있어. 그 놈과 친구가 되어야 해.”

여기서 ‘얼굴’은 가시적인 통제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확인이 불가능한, 미스터리한 공포가 아니라 압도적인 위력을 증명하는 실체로서 존재해야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는 공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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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모든 광기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편리고 순진하다. ‘지옥의 묵시록’이 천착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어떤 조직화된 공포가 조종 가능한 광기를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다. 전쟁에 내몰린 군인들이 침착하기를 기대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들이 전쟁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선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같은 생명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게 가능할 것인가?

따라서 윌라드가 목격한 미군들의 모든 광기는 통제 안에 있기 때문에 권력의 입장에선 안전한 것이다. 반면 통제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위험한 커츠는 자신만의 통제권을 가지고 공포를 조율하는 자다. 누구를 죽이든, 얼마를 죽이든, 명령 주체의 이익에 복무한다면, 그 광기는 권력의 입장에선 합목적적이다. 그러나 커츠는 그 합목적성에서 이탈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위험한 게 아니라, 단지 권력에 대한 위협일 뿐이다.

앞서 윌라드를 커츠 대령의 은신처로 실어 나르던 배의 군인들은 공포에 질려 아무 혐의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세 명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 일은 그냥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들과 똑같이 소중한 목숨이 셋이 한꺼번에 날아갔는데, M60 기관총을 지닌 미군 입장에서 그건 타당한 공포였고, 따라서 합목적적인 광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반복 강조하기 위해 ‘지옥의 묵시록’에 대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전쟁 상황이 아님에도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합목적적인 광기가 잔혹한 인격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지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은, 당신의 공포 때문에 타인에 대한 광기가 합리화된다고 믿는가? 혹은 당신의 광기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여기, 우리가 속한 지옥의 조연 가운데 한 명이다. 고도로 통제된 지옥의 조연. 나는 무기가 없으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나를 향한 총부리를 거두시라. 당신을 조종하는 이는 저 위에 있는데, 왜 나를 향해 총을 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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