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프랑켄슈타인 | 3부 5

2개월 전

5
항해가 끝났다. 우리는 육지에 올라 파리로 향했다. 내 몸에 무리한 여행을 강행해 온 나는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걸 곧 깨달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쏟았지만, 내 고통의 원인을 몰랐으므로 엉뚱한 방법으로 병을 고치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내가 사람들과 교류하여 활기를 되찾기 바랐지만, 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혐오스러웠다. 아니, 사람들을 혐오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의 동료였고 같은 종족이었으며,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일지언정 천사의 성품과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마음이 끌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과 교류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피를 보고 기뻐하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즐거워하는 적을 풀어 놓지 않았던가. 신을 모독한 내 행위와 나 때문에 벌어진 죄악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나를 미워하고 세계 곳곳에서 날 잡으려고 몰려올까!
아버지는 결국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내 고집에 굴복했고, 내 절망감을 떨쳐 버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때로는 내가 살인 혐의를 뒤집어썼던 사실에 큰 수모를 느낀다고 생각했는지 자존심은 헛된 것임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참다못한 내가 소리쳤다.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저를 잘 모르세요. 나처럼 비열한 사람이 자존심을 느낀다면 인간은, 인간의 감정과 열정은 완전히 타락할 겁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저스틴은 제가 결백한 것처럼 결백했지만 똑같이 살인 혐의를 썼고 그 때문에 죽었어요. 그건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제가 그녀를 죽인 겁니다. 윌리엄, 저스틴, 앙리도 모두가 저 때문에 죽었다고요.”
아버지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내가 그렇게 자책할 때면 아버지는 해명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어떤 때는 그것을 환각 때문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사실 그런 생각들은 내가 병에 시달리는 동안 상상 속에 저절로 떠오른 것이지만, 정신이 들면 그런 기억을 묻어 두곤 했다. 내가 만들어 낸 괴물에 관해서는 설명을 피하고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말을 하면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볼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그 사실에 관해서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게다가 듣는 사람을 경악시키고 감당 못 할 공포를 심어 줄 비밀을 털어 놓을 자신도 없었다. 결국 나는 공감을 구하려는 초조한 갈증을 억누르고, 그 엄청난 비밀을 세상에 고백할 날이 올 때까지 침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지금까지 한 그런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것들에 대해선 아무런 해명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실이 비밀스러운 비애의 짐을 얼마간 덜어 주었다.
내 잘못이라고 주장할 때면 아버지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빅터, 대체 뭐에 홀린 것이냐? 제발 부탁하는데 다신 그런 말 꺼내지 말아라.”
나는 힘껏 소리쳤다. “난 미치지 않았어요. 나를 지켜보던 저 태양과 하늘이 내 진실을 말해 줄 증인입니다. 내가 그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장본인이에요. 그들은 내 음모 때문에 죽은 거라고요. 그들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얼마든지 내 피를 흘리겠어요. 하지만 아버지 말씀대로는 못 합니다. 모든 인류를 희생시킬 순 없단 말입니다.”
말이 그렇게 끝나자 아버지는 내가 혼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화제를 바꾸어 내 생각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사건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기를 간절히 기원했고, 따라서 다시는 그 사건을 입에 올리거나 불행한 심정을 토로하지 않게 했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좀 더 진정되었다. 내 가슴속엔 고통이 둥지를 틀었지만 나는 내 범죄에 관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나로선 그것을 의식하는 것으로도 족했다. 가끔씩 고뇌의 긴급한 목소리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극단적인 자학을 통해 그 목소리를 억눌렀고, 나의 태도도 얼음 바다를 다녀온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안정되고 차분해졌다. 우리가 파리를 출발해 스위스로 향하기 며칠 전, 나는 엘리자베스에게 이런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파리에서 삼촌이 보내신 편지를 받고 정말 기뻤어. 이제 네가 있는 곳도 까마득히 멀지는 않으니 어쩌면 두 주가 지나기 전에 너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구나. 가엾은 내 사촌,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네 얼굴은 제네바를 떠날 때보다 훨씬 안 좋아졌겠지. 불행하게 지나간 이번 겨울은 가슴 졸이며 힘들게 보냈어. 하지만 네 얼굴에서 평화를 볼 수 있기를, 그리고 네 마음에서 편안함과 고요함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님을 확인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나는 1년 전에 너를 불행하게 만든 그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는 두려운 예감이 든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 만큼 더 깊어졌을지도 모르고, 많은 불행이 너를 무겁게 짓누르는 이런 시점에 너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삼촌이 출발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만나기 전에 몇 가지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해명이라니! 어쩌면 이 말에 놀랄지도 모르겠네. 엘리자베스가 해명해야 할 일이 뭐 있을까? 네가 정말 그렇게 말한다면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이미 들은 셈이고 내 의심도 해소된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너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불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으니까 나의 해명을 들으면 안심이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실제로 그럴 것 같아서 더는 이야기를 미룰 수가 없었어. 사실 네가 없는 동안에도 종종 너한테 말하고 싶었지만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지.
빅터, 너도 잘 알 거야. 옛날부터 네 부모님이 너와 나의 결혼을 꿈꾸시던 것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그 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어. 우린 실제로 어린 시절 잘 맞는 소꿉친구였고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였다고 믿어. 하지만 남매라면 서로에게 애정을 품는다 해도 좀 더 친밀한 결합을 바라는 욕심은 생기지 않지. 어쩌면 우리 사이도 그런 것이 아닌지? 사랑하는 빅터, 대답해 줘. 답장해 주기 바라. 우리 서로의 행복을 걸고 단순하고 진실되게 말해 줘. 사랑하는 다른 여자가 있는 건 아닌지?
너는 많은 곳을 여행했지. 잉골슈타트에서는 몇 년을 살았고 말이야. 사실 작년 가을 네 모습은 너무나 불행해 보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피해 고독 속으로 도망치곤 했어. 그래서 솔직히 나는 네가 우리 관계를 불만으로 여기면서도,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도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뜻을 따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 정말 그렇다면 그건 잘못된 거야. 고백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로 네가 늘 곁에 있어 주기를 꿈꾸고 있어. 하지만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만큼 너 또한 행복해지기를 비는 마음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너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우리 결혼은 영원히 불행할 것이라고 말이야. 어쩌면 너는 잔인한 불행에 억눌려서, ‘도의’ 때문에 유일하게 네 자신을 회복시켜 줄 사랑과 행복의 모든 희망마저 깨뜨려 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눈물이 나. 나는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너의 소망에 장애가 되어 너의 불행을 가중시키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 빅터! 내 사촌이자 소꿉친구인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으로 비참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믿어 줘. 부디 행복해, 빅터. 네가 이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준다면, 세상 어떤 것도 내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게 될 거야.
이 편지 때문에 괜히 부담 갖지 마. 네가 힘들다면 내일이나 모레, 아니 여기 도착할 때까지 답장하지 않아도 돼. 너의 몸 상태에 관해서는 삼촌이 편지를 써주실 테니까. 그리고 우리가 만났을 때 이 편지 때문이든 또는 그 밖의 내 노력 때문이든 너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나에게 다른 행복은 전혀 필요하지 않아.
17××. 5. 18. 제네바에서
엘리자베스 라벤차

이 편지를 보자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 악마의 위협이 되살아났다. ‘네 결혼 첫날밤에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받은 선고였다. 첫날밤에 악마는 나를 파멸시키려고, 내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약간의 행복에서 나를 떼어 놓으려고 모든 흉계를 꾸밀 것이다. 그는 그날 밤에 나를 죽임으로써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좋아, 어디 그렇게 해봐라. 그렇다면 틀림없이 죽을힘을 다하는 싸움이 벌어지겠지. 그 싸움에서 그가 이기면 나는 평화를 찾을 테고 나를 뒤흔들던 그의 능력도 결국에는 끝이 나겠지. 그가 패한다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맙소사! 무슨 자유? 그것은 자기 눈앞에서 가족이 학살당하고, 오두막이 불타고, 밭이 못 쓰게 되고, 그래서 결국 집도 없는 빈털터리로 외롭게 떠도는 신세가 된 농부가 누리게 된 자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이 나의 자유였다. 다만 나는 엘리자베스에게서 보물을 찾게 될 것이다. 아아,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끔찍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보상해 줄 보물이 남는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엘리자베스!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어느새 촉촉해진 감정이 사랑과 기쁨의 낙원에 대한 꿈을 속삭였다. 그러나 금단의 사과는 벌써 먹어 버렸고, 천사의 팔은 나를 모든 희망에서 떠밀고 있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것이다. 괴물이 자신의 협박을 실천에 옮긴다면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결혼이 내 운명을 재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파멸은 몇 달 안에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 악마가 자신의 협박 때문에 내가 결혼을 미룬다고 의심하면 보나마나 더 끔찍하게 복수할 다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내 결혼 첫날밤에 찾아오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협박이 곧 그동안은 조용히 있겠다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피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처럼, 협박을 공표한 후 곧 클레르발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촌과 바로 결혼하는 것이 그녀나 아버지의 행복에 도움이 될 터였다. 어차피 적은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이고 내 목숨은 한 시간을 넘기지 않을 테니까.
이런 심정으로 나는 엘리자베스에게 답장을 썼다. 차분하고 애정이 가득한 편지였다.

‘사랑하는 내 여인에게.’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상에는 우리를 위한 행복이 거의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누리게 될 그 행복은 모두 너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야. 그런 쓸데없는 두려움은 떨쳐 버려. 오직 너에게만 내 인생을, 그리고 만족을 위한 노력을 바치겠다. 엘리자베스, 나한테는 한 가지 비밀이, 아주 무서운 비밀이 있어. 내가 그걸 털어놓는다면 네 몸은 공포로 오싹해질 거야. 그런 다음에 너는 내 불행을 놀라워하기는커녕 그걸 견디고 살아온 것이 신기하기만 하겠지. 그 참담하고 끔찍한 이야기는 우리가 결혼한 다음 날 해줄 생각이다. 우리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서로를 믿어야 가능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 얘기를 꺼내지도 말고 떠보지도 말아 주었으면 해. 이것은 나의 간곡한 부탁이야. 네가 들어줄 거라고 믿는다.’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받은 지 일주일쯤 지나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 착한 여자는 따뜻하게 나를 맞아 주었지만, 내 수척해진 몸과 열로 달아오른 뺨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 역시 달라져 있었다. 몸은 야위었고, 예전에 나를 매혹하던 비할 데 없는 생기발랄함은 상당 부분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상냥한 태도와 동정 어린 부드러운 표정 때문에 그녀는 나처럼 고달프고 불행한 남자에게 좀 더 어울리는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 겨우 누리게 된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억은 광기를 불러왔고 지난 일을 생각할 때면 진짜 정신 착란이 나를 덮쳤다. 때로는 격하게 날뛰며 분노로 이글거리다가도 때로는 낙심하여 풀이 죽곤 했다. 누구에게 말을 걸거나 얼굴을 쳐다보는 일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나를 덮친 수많은 불행에 어쩔 줄을 몰랐다.
오직 엘리자베스만이 이런 발작에서 나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격정에 휘말린 나를 달래 주었고 마비 상태에 빠진 나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나를 위해 울어 주었다. 내가 정신을 차릴 때면 그녀는 나를 타이르며 체념시키려고 애썼다. 아! 불행한 사람은 운명에 체념하면 그만이지만 죄를 지은 사람한테 평화는 없는 법이다. 슬픔에 탐닉하다 보면 이따금씩 달콤한 사치를 누릴 때도 있지만 양심의 가책은 그마저도 독살시킨다.
내가 도착하고 얼마 후 아버지는 엘리자베스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라고 했다. 나는 침묵했다.
“그렇다면 달리 생각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고 우리 결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 날짜를 잡도록 하지요. 그날이 오면 엘리자베스의 행복을 위해, 살아서든 죽어서든 나 자신을 바치겠습니다.”
“빅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비록 무거운 불행이 우리를 덮쳤지만 남은 것들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쏟도록 하자꾸나. 우리 식구가 많지는 않지만 사랑과 공통의 불행이라는 끈으로 더욱 가까이 묶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네가 느끼는 절망이 누그러질 때쯤이면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태어나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게 빼앗긴 사람들의 자리를 대신해 줄 게다.”
아버지는 그렇게 타일렀다. 그러나 나는 괴물의 협박이 다시 떠올랐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 악마가 지금까지 유혈극에서 전능한 능력을 보여 주었던 만큼 나는 그를 대적할 수 없는 상대로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그가 ‘네 결혼 첫날밤에 찾아오겠다’고 선언한 이상 그 운명은 피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당연했다. 엘리자베스를 지킬 수만 있다면 죽는다 해도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만족스럽다 못해 활기찬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만 좋다면 열흘 후에 결혼식을 올리자는 아버지 말씀에 동의했다. 내 상상대로라면 그렇게 내 운명은 종지부를 찍을 터였다.
하늘도 너무하시지! 내가 그 더러운 녀석의 추악한 속셈이 뭔지, 한순간이라도 생각했다면 불행한 결혼에 동의하는 대신 차라리 내 고향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의지할 데 없는 방랑자로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괴물은 마력을 지니기라도 한 듯 나로서는 진짜 의도를 전혀 짐작도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판단했을 때 훨씬 더 소중한 희생자의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우리의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워서였는지 어떤 예감 때문이었는지 자꾸 심장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기분을 감춘 채 유쾌한 표정을 지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지만 항상 예리한 눈을 가진 엘리자베스까지 속이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차분한 기대로 우리의 결혼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확실하고 손에 닿을 것 같은 행복이 곧 허망하게 아무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영원히 사무칠 후회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과거의 불행으로 인한 두려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결혼식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하객들이 도착했다. 모두가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가슴속에서 나를 좀먹던 불안감을 단단히 단속했고, 비록 결혼식 절차가 내 비극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짐짓 진지한 척 아버지의 계획대로 따랐다. 그동안 아버지의 노력으로 엘리자베스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돌려받은 유산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코모 호반의 작은 땅이 그녀 것이었다. 우리는 결혼하자마자 라벤차 저택으로 가서 그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행복한 신혼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나는 그 악마가 노골적으로 공격해 올 때를 대비해서 몸을 보호하려고 만반의 조치를 취했다. 권총과 단검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그의 흉계를 막을 수 있도록 주위를 살폈고 이런 방법으로 상당한 안정을 얻었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협박은 내가 괜히 불안해하며 신경 쓸 가치가 없는 헛소리라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반면, 내가 결혼에서 바라는 행복은 엄숙한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좀 더 뚜렷한 모습을 띠어 갔고 어떤 사고가 일어나든 그 행복을 깨뜨리지 못할 거라는 속삭임이 계속해서 들리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행복해 보였다. 나의 평온한 태도가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소원을 이루고 운명을 마치기로 되어 있는 그날, 그녀는 왠지 기분이 가라앉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쩌면 다음 날 고백한다고 약속한 무시무시한 비밀을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한편 아버지는 기쁨에 들떠서, 법석대는 결혼식 준비 과정 속에서 우울한 조카를 보고도 그저 신부의 감상이겠거니 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아버지의 집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고 엘리자베스와 나는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 에비앙에서 그날 밤을 묵은 후, 이튿날 다시 항해를 계속하기로 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은 상쾌했다. 우리 부부의 승선에 모두가 미소로 축복해 주었다.
이때가 바로 내 인생에서 행복이란 감정을 마지막으로 누린 순간이었다. 우리 배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태양은 뜨거웠으나 우리는 차양 같은 것으로 햇살을 가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때로는 호숫가 한쪽으로 가서 몽살레브와, 몽탈레그르의 포근한 둔덕과, 멀리서 세상을 굽어보는 아름다운 몽블랑과, 그에 지지 않으려고 헛되이 목을 빼고 있는 눈 덮인 산들을 보았다. 때로 우리는 반대쪽 유역으로 배로 몰아, 우뚝 솟은 쥐라 산이 야망을 품고 고향 땅을 떠나려는 자들에게 어두운 비탈로 겁을 주고, 산을 정복하길 바라는 침략자들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난공불락의 방벽을 둘러치고 선 모습을 구경했다.
나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슬픈 얼굴이구나. 아! 지금까지 내가 무엇으로 고통 받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더 견뎌야 하는지 안다면, 너는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절망을 잊고 자유와 평화를 맛볼 수 있도록 해주겠지.”
“기분 풀어. 빅터, 너를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비록 내 얼굴에 기쁨이 넘치지는 않더라도 마음만은 만족스러우니까 걱정하지 마. 뭔가가 나한테, 우리 앞에 열린 미래를 너무 믿어선 안 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사악한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을래. 우리 배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좀 봐. 그리고 저 구름은, 형체 없이 흐릿하다가도 몽블랑의 지붕 위로 올라가 이 아름다운 장관을 더 볼 만하게 만들고 있어. 그리고 맑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수많은 물고기들을 봐. 바닥에 있는 돌멩이 하나하나까지 다 보이잖아. 정말 성스러운 날이야! 모든 자연이 너무도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여!”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우울한 주제와 관련된 모든 상념에서 스스로는 물론 나의 생각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기복이 심했다. 잠시 그 눈이 기쁨으로 빛나는 것 같다가도 곧바로 다른 생각이나 망상에 잠기곤 했다.
태양이 하늘 가장자리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드랑스 강을 지났고, 그 강이 높은 협곡 사이를 통과해 낮은 산의 골짜기로 빠지는 것을 보았다. 이쪽에서는 알프스가 호수에 더욱 가까웠다. 우리는 산맥들이 원형 극장을 이룬 동쪽 경계로 다가갔다. 에비앙 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주변을 둘러싼 숲을 비추었고, 겹겹이 쌓인 산맥 위로 봉우리가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우리 배를 밀어 주던 바람이 해 질 녘이 되자 산들바람으로 잦아들었다. 부드러운 바람은 잔물결을 일으켰고, 우리가 호숫가로 다가가는 동안 나무들의 경쾌한 몸놀림을 불러내면서 호숫가에서 꽃과 건초의 상큼한 향기를 실어 왔다. 물에 오를 때쯤 태양이 지평선으로 가라앉았다. 호숫가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이제 곧 나에게 감겨 들어 영원히 따라붙을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TEEMKR.COM IS SPONSORED BY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