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우리는 멜라니의 명복을 빌자

2개월 전

용돈 아껴 친구들끼리 극장에 출입하고 만화영화를 넘어서서 미성년자 관람가 외화에 눈을 들이며 자막 읽는 법을 익힐 즈음, 한 친구가 아는 체를 했다. “세계 어디에선가는 항상 상영되고 있는 두 개 있다. <벤허>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다.” 정말로 끊임없이 리바이벌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벤허>는 1959년작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자그마치 1939년작인데 둘 다 내가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었으니 잊을만하면 극장에 간판이 내걸렸던 것은 사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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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간판이 부산 남포동의 어느 극장에 다시 내걸렸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이미 읽은데다 명화 중의 명화라는 명성이 자자했던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지라 중간고사 끝나면 꼭 봐야 할 영화로 손꼽아 두었다.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된 뒤였으나 ‘클라크 케이블’(게이블인데 왜 사람들은 악착같이 케이블이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과 비비안 리의 앙상블도 궁금했고,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구현됐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같이 보러 갈 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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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러 안 갈래?”
“빨간앵두3? 봤다.”
“자슥아. 말고!”
“몸 전체로 사랑을? 그것도 봤다.”
“아 지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보러 가자고.”
“그런 영화를 와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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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유감스럽게도 당시 어울리던 녀석들은 아쉽게도 영화의 취향이 매우 좁고도 편향적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모르다니! 알아도 보고 싶지 않다니!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 왔다. “내하고 갈래?” 그 목소리를 듣고는 그다지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리 반 1등이자 전교 수위권을 다투는 범생이였다. 그런데 성격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의식이 드높아서 대놓고 ‘머리 나쁜’ 아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원성이 드높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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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왕따’라는 말이 없어서 ‘돌린다’는 표현을 썼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친구를 ‘돌렸다’. 밥도 혼자 먹었고 말도 잘 섞지 않았다. 체육시간에 살인배구라도 하면 어떻게든 그 친구를 가운데 끌어놓고 스파이크 먹이기를 일삼아 했다. “개 잡자!” (그 친구의 별명이 ‘개’였다. 오죽하면 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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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개’가 별안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녀석도 스크린을 정기 구독할 만큼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 얘기하다가 별 희한한 영화 지식을 장광설로 토해 놓으며 “이걸 모르고 무슨 영화 얘기를 하노?”하면서 기를 팍팍 죽이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나 녀석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극장에서 본 적은 없었기에 영화를 보러갈 작심을 했는데 나처럼 혼자 가기엔 뻘쭘했나보다. ‘개’랑 같이 영화 보러 가기는 싫었으나 그렇다고 남포동 머나먼 길을 혼자 가기도 그래서 약속을 했다. “중간고사 끝나는 날 남포동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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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시간 세 시간이 넘는 기나긴 영화였으나 지루했던 기억은 전혀 없다. 윌리엄 와일러가 <벤허>를 만들고 시사회하면서 “오 하느님 이 영화를 정말 제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괴기한 자뻑을 했다는 낭설 (한국에만 이런 얘기가 있다나)을 인용한다면 “오 하느님 이 영화가 우리 아버지랑 동갑이란 말입니까? 그 시대에 어찌 이런 영화를!”이라고 감동할 만큼 멋진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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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동(?)은 극장을 가득 메운 모 여고 단체 관람객들에 의해 배가됐다. 어찌나 장면마다 울고 웃고 고함 지르고 우워어어어 꺄아아악 괴성을 질러 대는지. 폐허가 된 타라, 굶주림과 공포에 찌든 가족들의 가장이 된 스칼릿 오하라가 벌판에 우뚝 서서 “난 절대 지지 않아. 해야 한다면 거짓말과 도둑질, 사기와 살인을 해서라도 다시는 굶지 않겠어. 내 가족을 굶기지 않을 거야.”라고 악을 쓸 때는 온 관중들이 박수를 쳤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극장에서 멋진 장면 나오는 와아 박수를 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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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감동을 안고 역시 명화는 명화다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극장을 나서는데 갑자기 ‘개’가 물어 왔다. “니는 니가 택할 수 있다 하면 스칼릿이 좋겠나 멜라니가 좋겠나?” 뭔 개소린가 했더니 여자친구나 애인으로 어느 쪽이 더 맘에 드는지를 묻는 얘기였다. “당연히 스칼릿이지! 나는 그렇게 딱 부러지는 여자가 좋아.” 그러자 녀석은 싱긋 웃으며 특유의 장광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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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릿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멜라니가 더 강하고 딱 부러지는 여자야. 온순하지만 눈 부릅뜨면 스칼릿조차 어쩌지 못하고 억수로 순종하는 것 같은 남편도 두 손 드는 여자, 남편과 스칼렛 사이의 묘한 느낌을 알면서도 다 품어내고 결국은 천하의 스칼릿이 매달리게 만드는 여자. 그게 멜라니라고.” 이후로도 긴긴 소리를 했는데 그 잘난 체와 따라갈 수 없는 박식함에 이를 갈아붙이고 외면해 버렸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녀석이 또 어깨를 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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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역 맡은 배우가 누군지 아냐?” 음 클라크 게이블은 알고 비비안 리 아는데 그거까지는 모르지...... 녀석은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라고 쓰고 억지로 버터 바른 발음이라고 읽는다) 배우의 이름을 읊었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올리비아 다빌랜드?” “이 무식한 ..... 귀족들에게 붙는 ‘드’가 사이에 있어.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내가 상상한 멜라니 역에 딱 맞는 배우였어. 애실리가 스칼릿과 다툴 때 스칼릿 편들면서 눈 부릅뜨는 거 봤냐? 집에 침입한 북군 죽일 때 그 표정하며..... ” 다시 나는 ‘개’를 외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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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영화를 보던 1986년에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우들은 대부분 세상에 없었다. 비비안 리는 운명적이지만 치명적인 사랑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끝장낸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비행기 사고로 잃은 아내 캐롤 롬버드를 평생 그리워했던 클라크 게이블은 그보다 먼저 196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극중 남편 애실리 윌크스 역을 맡은 레슬리 하워드는 영화 개봉 4년 후 참전한 미국 병사들을 위한 강연을 다니다가 독일군의 공격으로 비행기가 격추돼 사망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흑인 최초로 수상한 해티 맥다니엘도 1952년 세상을 떴으니 남포동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보던 때 이미 그 영화는 역사의 반열에 들어 있었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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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멜라니 역을 맡았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1986년에는 일흔 살로 현역 활동 중이었고 (1988년 은퇴) 2020년 7월 27일까지 생을 이어가던 그녀가 10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온전히 현실 아닌 역사의 무대로 그 필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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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의 엔딩신을 빌려서 상상해 보자면 끝없는 대지 위에 우뚝선 타라의 대저택에 다시금 발을 디디는 왕년의 멜라니,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클라크 게이블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맞고 있을 것이고 비비안 리가 끌어안고 너무 오랜만이라고 반기고 있겠지. 레슬리 하워드 역시 영화 내내 보여준 조각 같은 하지만 우물쭈물한 성실남으로 모자를 벗고 섰을 것이고 흑인 유모 맥다니엘은 극중 레트 버틀러가 선물한 빨간색 치마를 입고 활짝 웃으며 멜라니 등을 두들겨 주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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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또 하나의 장수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갔다. 헐리우드의 황금 시대를 경험했고 그 산 증인으로 거론되던 두 100살대 배우 모 두 이제는 인류의 곁을 떠났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요즘 인종 차별 이슈로 퇴출 소동을 겪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한 번 봐야겠다. 80년대 많이 불렀던 노래 <마지막 몸짓을 나누자>에서 '자 이제 우리는 멜라니의 노래를 듣자.'라는 가사가 있었다. 여기서 멜라니는 멜라니 윌크스가 아니라 가수 멜라니 사프카를 말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그 가사를 빌려 이렇게 노래해야겠다. "자 이제 우리는 멜라니의 명복을 빌자. 그 아득한 물결 속에서 마지막 추억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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