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데이TV> 냉면 속 고향

2개월 전

오늘의 썸데이TV - 6.15 공동성명일 냉면에 대하여


.
내 기억의 실록에서 가장 혹독했던 겨울 시즌으로 기록된 2000년과 2001년 사이의 겨울의 어느 날, 나는 천 개의 침이 되어 온 살갗을 찔러대는 겨울 바람을 뚫고 한 냉면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월남에서 스키를 팔라고 하지, 근래 들어 유례가 없는 이 혹한에 냉면집을 촬영하자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뻗대었지만 방송은 내일인데 그나마 섭외된 곳이 이곳 뿐 이라는 데야 재간이 없었다. 작가는 미안한 듯 덧붙였다.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랍니다.” 원래고 뭐고 이 날씨에 냉면 먹으러 오는 손님이 몇이나 있을까.
.
온몸이 동태처럼 빳빳하게 얼어붙어 찾아든 냉면집 마루에는 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이 냉면집을 창업했던,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평안남도 출신의 고집쟁이 노인의 아내였다. 황소 바람이 윙윙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던 내게 할머니는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그쪽과는 걸쳐진 인연이 반 자락도 없건만 이상하게도 나는 조선 팔도 사투리 가운데 평안도 사투리가 가장 듣기에 편안하고 정겹다) 겨울 냉면의 맛을 전해 주셨다.
.
“이 냉면은 말입니다. 삿자리를 뜨끈뜨근하게 해 놓고 그 위에 앉아서리 달달 떨면서 먹는 음식이야요. 그때가 제일 맛이 있디요. 이열치열이라 그래개지구서리 여름엔 더운 거 먹디 않아요? 겨울에 이가 시리게 메밀 면발 툭툭 끊어 먹구서리 뜨뜻한 육수 한 모금 마시면 대동강물이 꽁꽁 언대두 입 안은 살살 녹는다니까니.”
.
화제는 ‘피양 박치기’로 유명한 서북 사람 아니랄까봐 우렁우렁한 목청과 벼락같은 호통으로 평생 자신의 기를 죽였던 남편으로 옮아갔다.
.
“쬐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문 아주 장비같이 호통을 쳐 댔디요. 육수 맛이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문 내다 버리기두 했어요. 지금 아들 녀석이 한다고는 하는데 길쎄요...... 아직은 그 맛이 안 나요”
.
느릿느릿 하지만 음절 하나 하나에 악센트가 똑똑 주어지는 평안도 사투리의 ‘니야기’(이야기)에 넋 놓고 빠져드는 참인데 주방 쪽에서 분위기를 뚝 끊는, 방송 용어로 “국어책 읽는 듯한” 서울 말씨가 들렸다. “엄마 내가 꼭 낼게 그 맛 내가 꼭 내고 만다니까.” 아버지 대신 주방을 맡은 아들이었다.
.
이런 어색한 대사는 편집 때 어김없이 잘려 나가게 마련이다.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살려 둘만큼 관대한 PD는 없다. 하지만 아들의 다짐은 방송을 탔다. 아들의 말꼬리에 따라붙었던 할머니의 대답 덕분이었다
.
. “그래 00야. 꼭 내라. ......그 맛 네레 꼭 책임지고 내라.”
.
어느새 할머니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곱씹었다. 되뇌었다. “꼭 내라. 꼭 내야 된다.” 할머니에게 냉면은 요리가 아니었다. 갈 수 없는 고향이었고, 돌아간 남편이었다. 돌아오는 봄, 할머니는 금강산으로 갈 배편을 예약하고 계셨다. “동서로 천리는 떨어딘 곳이지마는 니북땅은 니북땅이니께니” 가 보고 싶다고 했다.
.
고인이 된 남편의 사진 아래에서 육수 젓는 아들에게 네가 꼭 아버지의 맛을 내야 한다고 울먹이던 할머니 역시 고인이 되셨다. 그분뿐만이 아니다. 내가 단골로 삼았던 냉면집 "을밀대“의 주인장 할아버지도 끝내 꿈에도 잊지 못할 평양성 을밀대를 올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셨고, 수십 년 타향살이 동안 퍼머 한 번 하지 않고 독하게 살면서도 “밥 한 그릇에 눈물 나는 사람이 지금이라고 없는 줄 아느냐?”고 진하게 배어나는 평안도 억양으로 되묻던, 그래서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밥을 더 먹이려고 애쓰던 평안도 출신 해장국집 할머니도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
성성한 백발이 육수에 젖지 않을까 저어될 만큼 냉면 그릇째 벌컥벌컥 들이키던 냉면집의 오랜 단골들도 아마 반수 이상이 당신들이 그렇게도 즐기시던 냉면집을 찾지 못하실 것이다.
.
그분들은 2000년 6월 15일을 눈물과 감격으로 맞았다..... 정말로 고향에 갈 날이 성큼 다가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끝내 그러시지 못했고...... 그 뒤로도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우리 현대사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그들과 함께 한 음식 냉면 이야기....
.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 부탁드려요.... ^^ 새롭게 랜덤으로 시작하는 썸데이TV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TEEMKR.COM IS SPONSORED BY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