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1장] 독서쟁이 75 - 언어의 온도(이기주 저) 38_라이팅은 리라이팅

지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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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쯤 전화가 걸려왔다. 일간지 기자로 근무하는 후배 녀석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렀다. "선배 자고 있었어요? 제가 잠을 깨운 건 아니죠?"
이 질문은 상대방이 정말 잠이 들었는지를 물어보는게 아니다. 이런 표현에서 내가 잠시 당신의 숙면을 방해할 테니 시간을 좀 내달라는 속뜻이 녹아있기 마련이다. 이때 다짜고짜 "너 지금 몇 시인 줄 알아?"라고 대답하면 매몰찬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만다.
어쨌든 난 "잠이 들었는데 네가 깨운 것 같다. 하하, 이거 장난인 거 알지? 아무튼 무슨 일이야?"라는 식으로 얼토당토않은 농담을 구사했던 것 같다.
외국물 좀 먹은 후배는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대뜸 물었다. "글쓰기, 그러니까 라이링(라이팅)이 도대체 뭐죠?"
후배의 발음에선 '빠다' 냄새가 강하게 풍겼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선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기자직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뭔가 그럴듯한 대답이라도 들을 요량으로 술김에 질문을 던진 듯했다.
평소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 심도 있게 하는 편이지만 후배가 원하는 정말 그럴듯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새벽 2시였다. 나는 얼떨결에 둘러댔다.
"라이팅? 글쓰기? 글은 고칠수록 빛이 나는 법이지. 라이팅은 한마디로 리라이팅이라고 볼 수 있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잠결에 전화를 받았던 터라 말장난 비슷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예 빈말은 아니었다. 특별한 글쓰기 비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은 고치는 행위의 연속일뿐이다. 문장을 작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괜찮은 글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날 리 없다.
좀 더 가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찾아낼 때까지 펜을 들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지루하고 평범한 일에 익숙해질 때, 반복과의 싸움을 견딜 때 글은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그 후배도 '라이팅은 리라이팅'이라는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렸을까? 그럴 거라 믿는다. 그날 이후 녀셕이 새벽에 불쑥 전화를 걸어 "선배, 글쓰기가 뭐죠?"라고 질문을 던지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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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 nice keep up the 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