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핑거스미스 - by 세라 워터스

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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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젠틀맨, 하녀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핑거스미스>라는 제목도 확 와닿지 않았고(영어로 '소매치기'라는 뜻이다), 표지도 너무 어두웠으며, 게다가 무척이나 두꺼웠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들었다는 영화 <아가씨>도 보지 않았다. 영화는 명작이라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왠지 어두울 것 같았고, 그런 어두운 내용을 굳이 책으로 읽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책을 다루는 걸 들었다. 책은 길지만 스토리가 재미있다고 칭찬을 하는 걸 듣고, 그래, '빨책'의 추천이라면 읽어볼 만하지,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 <핑거스미스>



출처: 교보문고
한글판 표지. 분홍색 제목, 분홍색 띠지. 뭔가 로맨스소설 같은 느낌이다. 영화 포스터와는 딴판인.


젠틀맨은 사기꾼이다.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를 꼬셔서 재산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삼촌의 보호 아래 커다란 성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아가씨 '모드'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가 없어서 순진하기 그지없었고, 젠틀맨 같은 사기꾼에게는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젠틀맨의 계획은 이랬다. 결혼을 해야만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모드를 유혹해서 그녀와 결혼을 한다. 그녀의 재산을 가로챈다.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하면 아가씨가 젠틀맨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너무나 사랑해서 삼촌 몰래 둘이 야반도주를 하게끔? 그래야 삼촌이 보호해줄 수 없는 먼 곳에서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재산을 가로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 '하녀'의 역할이 필요했다. 아가씨 옆에서 수발을 들면서 그녀가 젠틀맨과 사랑에 빠지도록 바람을 넣고, 야반도주를 하도록 부추길 하녀. 젠틀맨은 도둑 소굴에서 살고 있는 '수전'에게 그 하녀 역할을 맡긴다. 계획이 성공하면 한 몫 두둑하게 챙겨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이렇게 아가씨, 젠틀맨, 하녀가 책에 등장하게 된다. 각자의 꿍꿍이와 계획을 가지고.


반전. 그리고, 반전. 또, 반전.


이 책의 장점이라면, 책이 재미있다는 거다. 조금 자극적이고, 살짝 야하고, 꽤 흥미진진하다. 약방의 감초처럼 출생의 비밀, 복수, 로맨스도 나온다. 거기에 반전도 있다.
반전이 한번만 있는 것도 아니다. 큰 반전만 두번. 작은 반전도 서너번. 책이 길어서 이야기가 느슨해진다 싶으면 갑자기 요건 몰랐지? 하며 반전이 등장한다. 읽다가 어? 어라? 하고 놀라게 된다.

또다른 장점이라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영문학 박사 학위까지 땄는데, 그녀의 박사 논문 주제는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레즈비언과 게이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물'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이 바로 그 시대로 들어가 있는 듯, 그 시대의 복식이며 생황양식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 책의 한 주축인 두 여성(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필시 자신의 전공 분야를 십분 잘 활용한 덕분이리라.



출처: Goodreads
영어 원서 표지. 책 속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장갑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가 아가씨의 저택 같은 느낌을 준다. 한글 번역판과는 표지 분위기가 딴판이다. 오히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와 더 비슷한 분위기. 책을 읽고 나서는 한글판 표지와 원서 표지 중 어느 것이 더 책과 어울리는지는 의견이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책의 단점


위에서 책의 장점에 대해 말했으니, 단점도 언급해보겠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단점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 책이 길다. 영어 원서도 700여 페이지였는데, 번역판은 800 페이지가 넘는다. 이런 책은 단숨에 읽어야 반전에 놀라면서 재미있는데, 책이 너무 길다.

둘, 지루할 수 있다. 책이 길어서 지루한 게 아니라, 중복이 되어 지루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수전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2부는 아가씨 모드의 시점, 3부는 다시 수전의 시점이다. 그런데 1부와 2부가 화자는 바뀌었지만 같은 사건들에 대해 중복 서술하고 있다. 독자에 따라서는 "같은 사건도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구나. 그 사건에 이런 점이 숨어 있었구나."하고 놀라면서 재미있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읽는 느낌이 더 커서 2부의 진도를 나가는 게 조금 힘겨웠다.



출처: 다음 영화

박찬욱 감독,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 주연의 영화 <아가씨>.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영화는 (나는 아직 안 봤지만) 이 책의 1부와 2부만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이라도 책을 읽으며 또다른 재미와 반전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깨우는 말들


1.

“Why don’t she wear the kind of stays that fasten at the front, like a regular girl?” said Dainty, watching.
“Because then,” said Gentlemen, “she shouldn’t need a maid. And if she didn’t need a maid, she shouldn’t know she was a lady.” (p.38)

"왜 그녀는 보통 여자들처럼 앞에서 잠그는 코르셋을 입지 않을까요?" 보고 있던 데인티가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젠틀맨이 말했다. "그녀한테 하녀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만일 그녀한테 하녀가 필요하지 않다면, 그녀는 자기가 귀족 아가씨인지 모를 테니까."

왜 불편하게 코르셋을 잠그는 끈이 뒤에 있을까? 그런 옷은 혼자서는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옷을 입고 벗으려면 그 일을 도와줄 하녀가 있어야 하고, 하녀가 있다는 건 그녀가 고귀한 귀족 신분이라는 걸 나타내니까.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귀족들. 그런데 요즘도 그리 다른 것 같지는 않다.


2.

When I try now to sort out who knew what and who knew nothing, who knew everything and who was a fraud, I have to stop and give it up, it makes my head spin. (p. 117)

내가 지금에 와서, 누가 무엇을 알고 있었고 누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누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고 누가 사기꾼인지를 구분해보려고 하면, 난 멈추고 포기해야만 한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서로 속고 속이는 책 속 캐릭터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장면.


3.

He held it to me. (p. 183)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모르고 보면 그냥 평범한 문장. 책을 읽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스포이자 충격의 반전인 문장.
(스포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드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앞부분 설명을 뺐습니다.)


4.

I think, You have come to Briar to ruin me. (p. 255)

나는 생각한다. 넌 이 브라이어에 날 망치러 왔구나.

이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아가씨>. 그 영화 선전문구 중 이런 문장을 본 기억이 났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책을 보고 나면 이 문장이 딱 맞다는 걸 알게 된다.


5.

I wish – as I have wished many times – that my mother were alive, so that I might kill her again. (p. 293)

나는, 이전에도 수만 번 바랐듯, 내 엄마가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그녀를 죽일 수 있도록.

죽은 엄마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엄마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소수일 거다. 그녀는 왜 이런 소망을 가지게 된 걸까?


제목: 핑거스미스
원서 제목: Fingersmith
출판사: 열린책들
옮긴이: 최용준
저자: 세라 워터스 (Sarah Waters)
특징: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 주연,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 19세기 영국 배경의 이야기를 영화에서는 일제시대 한국으로 옮겨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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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오 영화를 재밌게 봤는데 원작 소설은 여러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군요 긴 책인만큼 쉴 때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영화도 재밌으니 꼭 한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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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바님, 오랜만이에요. ^^
영화도 나중에 시도해볼게요. 김민희와 김태리의 연기가 일품이었다고들 하더라고요. 하긴, 하정우와 조진웅도 연기라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니. 보고나서 후회하진 않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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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책을 많이 보시네요~
전 며칠전에 책장 정리를 했는데 안본책만 가득.ㅎㅎ
전시용 책장.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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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안 본 책 수두룩해요. ㅎㅎㅎ
집에 책 있는데도 안 읽고, 도서관에서 다른 책 빌려 읽기도 하고요.
김영하 작가가 그랬어요.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고. 꽂아놓으려고 사는 거라고. ㅎㅎㅎ

아까씨 원작소설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 브리님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너무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아. 저 해피써클 입니다. ^^ 아이디 새로 만들었습니다. ^^ 스팀잇 들어올때 마다 들렀었는데... 그게 오래전 이네요. 1042가 생각나지 않아서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왔어요. ^^ 오랫만에 인사드리고 갑니다. 건강히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