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낮, 밤

2년 전
in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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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밤을 새우고, 일본에 도착했다.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집 앞 정류장에서 네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래서 잘 시간을 놓친 후로는 자기도 애매해져 버렸다. 게임을 켜고 객기로 밤을 새웠다. 밤을 꼬박 새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덕에 버스 요금을 내지 않고 자리에 앉기도 하고, 몇 번이나 이상한 곳에 서 있기도 했다.

짧은 비행시간 동안, 또 공항에서 도심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새우잠을 잤다. 오늘 묵을 숙소의 체크인은 4시. 유일한 일정이었던 미술관이 휴관되면서 아무 계획 없는 날이 되었다. 뭔가를 찾아볼 힘도 없어 구글에 '교토 낮잠'을 계속 검색했다.

짐을 맡겨둘 생각으로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숙소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방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딱 두 시간만 자자'. 안대까지 끼고 야무지게 잤는데도, 일어났을 때 무척 피곤했다.


오늘은 딱히 뭘 할 계획은 없었지만, 맛있는 커피를 마시겠다는 다짐은 있었다. 의지를 가지고 몇 군데를 찾아보았다. 구글로 살뜰히 매장의 내부를 살펴보고, 다른 것들도 함께 찾아보면서 카페를 정했다.

가고 싶던 카페는 내가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었다. 산책 삼아 가보려 했는데, 마침 그곳도 쉬는 날. 그냥 숙소 근처에 있는 적당히 아늑한 카페에 와 글을 쓰고 있다. 6시도 안 됐는데, 벌써 캄캄해 숙소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다.


정신이 몽롱했던 오늘 새벽에는 레드벨벳의 앨범을 계속 들었다. 잠결에 들어서인지 들을 때마다 곡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의식 너머로 들려오는 레드벨벳 음악을 들을 때, S.E.S. 테이프를 사서 늘어지게 듣던 내 어린 시절이 함께 떠올랐다.

일본에 도착해서는 몇 번 플레이리스트를 바꿨다. 마일즈 데비스의 연주가 시끄럽게 느껴졌다. 레드벨벳의 Taste를 반복해 들었다. 그 곡을 들으며 걷는 길이 좋았다.

곡에는 '세상엔 달콤한 유혹이란 너무 많아'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한참을 '세상엔 달콤한 기억이란 너무 많아'로 잘못 들었다. 그 가사 때문에 그 곡이 좋았던 건데...

그 가사를 들으면서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이야기'에서 수십 번은 읽은 것 같은, 좋아하는 구절을 떠올렸다.

"저는 우리가 웃을 때마다, 크게 웃을 때는 더욱더, 그 웃음이 파편화된 삶에 무언가를 보태 준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큰 웃음과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짓던 낮이 지나가고, 그 짧았던 낮과 밤의 경계처럼 나는 금세 슬퍼져서 해도 다 져버린 싸늘한 강가를 보고 있다. 어두워지자마자 나는 만나지도 않은 누군가와 이별하게 되었고,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이유 없는 슬픔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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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때문에 가신건 아니죠? 나루님!!^^
즐거운 여행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달콤한 기억을 만들고 오세요 ㅎㅎㅎ

큔스파크리사이즈.gif
내년 오늘까지 꼭 웃을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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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요
그리고 여기 이자카야 강추!!

나루님 나루님 스팀챗 확인해주셔요~~!!

나루님도 한 달 가까이 쉬셨군요. 돌아오셍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