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는 싯가

17일 전
in kr

칩거 생활 동안 일의 수주 방식도 많이 변했다.

지인의 의뢰 -> 익명의 의뢰

지인의 의뢰는 시작부터 어느 정도 나의 '이름값'과 그에 상응하는 기대치가 반영되어있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페이를 왕창 비싸게 부른다. 거래가 성사되면 상대방은 나에게 이름값만큼 혹은 비싼 페이만큼의 결과물을 기대한다. 나는 상대의 기대와 하기 싫은 근본적 나태, 또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이상한 완벽주의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시달리며 살아간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과의 작업은 훨씬 간단하다. 상대방은 나에게 불필요한 기대 없이, 나를 단지 '원하는 작업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만 생각한다. 거기엔 별다른 인간에 대한 기대보다는 정확한 이야기만 오간다. 작업 내용, 페이, 기간 등등.


어제는 익명의 클라이언트에게서 받은 일의 데드라인이었다. 어제는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더니 결국 지쳐서 낮잠까지 자게 됐다. 푹 자고 일어나니 4시, 그때부터 자잘한 일 처리를 마치고 일을 시작했다.

이번 작업은 간단한 일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간단하게 끝낼 생각으로 페이를 적게 받았다. 작업할수록 이렇게 (대충) 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 페이에 큰 에너지를 쏟고 싶지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작업 속도로 일을 끝냈다. (30분)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딱히 모난 부분은 없는 상태였다. 더 하기는 싫어 클라이언트가 수정을 요청하면 그때 고쳐줄 생각이었다. 클라이언트는 결과물을 확인한 후 삼십분 간 답이 없었다(조마조마). 그리고는 너무 좋다고 답했다. 나는 (이렇게 대충했는데도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일은 끝났다.


앞으로 더 이런 일들을 많이 하고 싶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환상을 심고서 환상 대비 쪼그라든 결과를 받고 실망했던 적은 나도, 나에게 일을 맡겼던 상대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냥 적당히, 완벽주의 같은 것은 내려놓고 사소한 일에 에너지를 쏟지 말 것. 그게 음악가로서 옳은 태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일을 오로지 상인의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음악이라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내가 착취당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이 이상한 완벽주의를 꺼내 그 작업의 끝에 내 이름을 담아야 할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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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셨네요^^ 서로 윈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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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일까요? ㅋㅋㅋ 오늘은 이 글을 쓰고 급 반성하게 되던데... 좋게 생각할게요 :)

제 경우에 페이는 항상 "나에게 얼마나 쉬운가"가 아닌 "상대방에게 얼마나 어려운가"로 정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한번 참고해보세요 :)

(아마도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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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그렇게 생각 못 해봤는데, 그렇게 하면 저 금방 부자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자신이 하지 못하면서도, 그 일을 무척 쉽게 여기는 경우도 왕왕 있답니다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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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q님의 그 원칙 저도 참고해야겠어요. 적어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