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 낯선 새벽 세 시

2년 전
in kr

오늘 만난 학생은 반쯤 얼이 나간 표정을 지으면서,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저 정말 괜찮은데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 학생이 언제 울음을 터뜨릴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갔는데, 학생은 생각보다 담담해 했다. 담담하지 않은 일 속에서, 또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가늠하기 힘든 무게 앞에서는 오히려 멍-해지지라고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 기억에서 지운 과거를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스스로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몰아세우기만 했던,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기만 했던 과거(어쩌면 불과 몇 달 전)를 뒤로 하고 나니 삶이 행복해졌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그 순간부터 행복해지다니... 믿기 힘들지만 나는 정말로,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몇 달 치 일이 한꺼번에 몰렸던(대체 왜 늘 이렇게 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밤새 작업을 하고 밖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작업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저번 주에는 많은 돈을 벌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많은 돈이니 누군가에겐 푼돈일진 모르겠으나, 자연스레 집에서 하는 일이 늘어난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인 감정을 느꼈다. 생각보다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겠는데?


요즘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올해 17살이 된 게임 친구다. 게임을 좋아하고 컴퓨터를 좋아하는, 텐키리스 키보드를 사고 싶어 용돈을 열심히 모으고 있는 아이다. 머쓱한 마음에 나이를 말하지 못하는 내게 "누나 우리 엄마보다는 어리지?"라고 묻는데, 그럼 난 또 그게 웃겨 한참을 웃는다.

이 친구를 따라다니면서 이름만 들어봤던 게임을 하나둘 해보게 됐다. 내겐 새로운 모든 것들이 두려움인데, 이 친구에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매번 "나 정말 못하는데 괜찮아?"라고 말하고, 그 친구는 "뭐 어때"라고 말한다.

정말로 게임을 못 하는 내게 짜증 한 번 낸 적 없는 이 귀여운 친구에게 텐키리스 키보드를 선물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이모가 되려나?)


삶이 행복해지면서 소비가 엄청나게 줄었고(그것과는 관련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부자가 되었다. 실체 모를 욕심을 버리면서 바보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그래서 돈도, 시간도 많은 사람이 되었다. 적게 벌고 적게 쓰고 적게 일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며칠은 밖에서 일 해야 하지만, 남는 시간엔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지낸다. 가끔은 소중한 이를 만나기도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삶이 웃음으로 빼곡히 채워진다.

가장 새롭다 느끼는 건, 음악을 들을 때다. 요즘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환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곤 한다. 순수하게 음악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음악이 존재하고, 그런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어디까지나 내 방식으로지만), 그런 음악을 사랑할 수 있다니! 그런 걸 느낄 때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날아오르는 기분이 든다.

요즘은 음악을 들으면, 그 안에 있는 어떤 아름다운 한 프레이즈를 들으면 마음이 두근거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지금 나는 깊이도 모르는 어떤 구덩이에 자빠져있는 것 같은데, 그 구덩이를 나와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면 그때는 좀 더, 어쩌면 훨씬 더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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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사시네요.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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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이에요 나루님 글에서 행복이 묻어나는것 같아 저더 덩달아 가분이 좋아지네요^^

가끔은 가벼운게 진지한것보단 좋은것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언제나 늘 그렇지만 바쁘게 또 담담하게 삶을 살아가시네요.

Hey, girl! missing you.

으앗 나루님이다! 나루님 저 어제 땅고의 나라에 왔어요! 오늘은 아침부터 반가운 포스팅이 벌써 두 개째인 것을 보니 멋진 하루가 될 것 같아요. 엽서 보낼게요! :-)

“실체 모를 욕심을 버리면서 바보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그래서 돈도, 시간도 많은 사람이 되었다. 적게 벌고 적게 쓰고 적게 일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최고네요!

전 오래 쉬었더니 되려 일을 하려 활력이 솟는 중이에요.

우리 늘 행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