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diary] 문장을 훔치고 싶은 나날들

작년
in kr


매체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좋은 글들을 보며 생각했다. 문장들을 잘 프린트 한 뒤에 한 단어씩, 한 문장씩 찢어서 삼키고 소화시키다보면 나도 어느샌가 그러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여러 갈래의 문장들이 있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들과 취향은 으레 존재하기 마련이고 꼭 맞는 어구를 보게되면 나는 훔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어떤 문장들은 두고두고 필사하게 되기도 한다.)

굳이 억지로 적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최근 작업하던 비평은 두 페이지 남짓 적다가 그만두었다. 비평이란 결국 어떤 작품의 주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무리 개똥 같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위에 좋은 해석과 외연의 확장을 둘 수 있다면 괜찮은 작업일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진행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적는 작업의 결과물은 나로서도 독자로서도 별로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멈추었다. 약간은 아쉽게 된 느낌이지만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계획했던 작업을 포기한다는 것이 사실 개운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괜찮아졌다.

가끔 토해내듯 끄적거리며 적고 싶을 때가 있다. 애초에 탄탄한 문장의 형태로 사고하기 보다는 직관의 형태로 상념을 잡아가며 글을 쓰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형태는 조금 더 시(詩)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시를 적는다는 뜻은 아니다. 제대로 시를 적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며 정상과 정상이 아닌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상 미묘한 지점을 잘 포착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결국 대부분에게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다시 말하자면 조현병 환자가 적는 듯한 시어의 파편들이 터지더라도 일관성과 규칙성을 잘 잡아야한다는 소리다. 이건 내가 좋아하거나 추구하는 세계가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사실 함민복 선생님이나 심보선 선생님이 그려내는 세계처럼 따뜻하고 인간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사실 꾸준함의 신화를 잘 믿지 않는다. 입력이 없는 꾸준함이란, 그냥 무의미한 출력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매너리즘에 빠질 때 쯤 되면 차라리 문장을 씹어 삼키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문장이 어렵다면, 아예 삶의 경계 밖으로 한번 디디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도 말로만 쉽지 무척 어렵지만, 원체 우리에게 쉬운 일이 있기나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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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이 없는 꾸준함이란, 그냥 무의미한 출력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력이 없는 꾸준함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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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정도의 차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정도가 최소한 스스로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을 정도면 참 좋겠어요 :)

너무나 공감가는 훔치고 싶은 마음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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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저는 주저없이 훔칩니다. (훔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단, 꼭꼭 씹어서 삼켜서 정말로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에요-

  ·  작년

정말 쉬운일이 없는 것 같아요. 문장 필사도 하시는군요?ㅎ 저도 문장수집이란 워드파일에 좋아하는 문장들을 모아놨어요. @qrwerq 님이 좋아하실진 모르겠지만 하나 붙여넣어 봅니다 :-)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중 대부분은 도망 다니는 일 이었다.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나는 괜찮다. “가치 있는 재능과 가치 없는 재능을 평가하고 나누는 세상이 가장 문제죠. 다들 재능을 다각도로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천재가 맞는데, 이 사람이 가진 천재적인 분야가 스스로든 남에 의해서든 평가절하돼서 드러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봐요.”

-채널예스, 5월, 만화가 이종범 인터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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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필사를 할 때에 느껴지는 호흡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눈으로만 슥 훑으면 느껴지지 않는 감촉, 여운, 생각의 전개를 사랑합니다.

"무언가의 천재"라는 말이 좋네요. 재능은 재능대로 드러날 수 있는 삶 - 온전히 바랄 수 있는 삶의 여건이 가끔은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도망다니지 않을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만으로도 굳건한 중심을 잡고 있는 삶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아실 것 같지만, 저는 이현세 선생님의 "천재와 싸워 이기는 방법" 이라는 글을 좋아합니다. 아래 일부 문단을 붙여봅니다.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신의 벽을 만나면
천재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종내는 할 일을 잃고 멈춰서 버린다.

이처럼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10년이든 20년이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날 멈춰버린 그 천재를 추월해서
지나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긴긴 세월에 걸쳐 하는
장거리 승부이지 절대로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

공감합니다. 너무 잘읽고 가네요

팔로우 할게요 @qrwerq님 자주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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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인적으로 필사도 해보고, 포스트잇도 붙이고, 스캔도 해보고 하지만 뭐든 꾸준하게 하기는 어렵더군요. 자신에게 잘 적응되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 항상 어려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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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자기 자신을 잘 알아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꾸준함의 정도도, 어쩌면 방향과 특성에 달린 듯 해요.

  ·  작년

그래도 꾸준함이 있으면 무엇인가 얻어가는것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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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네, 무언가는 얻어갈 것이라 기대합니다. 최소한 어떤 꾸준함이 좋고 좋지 않은지에 관해서 분별할 수 있을 정도만 되더라도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라고 봐요.

문장은 훔칠 수 없어, 대신 단어를 훔치고 있습니다. 쓰는 단어가 한정적인지라, 안쓰는 단어들만 정리해서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문장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훔치고 싶은 문장에 닿기까지는 참으로 요원하기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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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단어를 훔친다는 건 결국 단어의 맥락과 공간을 훔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게모르게 문장을 직조할 때에도 그 특성이 반영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문장은 사고 구조를 반영하기에, 작성자가 내가 되지 않는 이상 완벽히 훔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