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이브

2개월 전
in kr

6월항쟁 이브에 이르기까지.

  • 내일이면 알게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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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보다 한 해 앞선 1986년은 매우 우울한 한 해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다. 전편에서 언급한 성고문 사건은 그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86 아시안 게임을 성공리에 치른 뒤에는 더 기세가 등등했다. 급기야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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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운동을 양분하고 있던 ‘자민투’ 세력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정권에 강력히 맞서야 한다고 봤고 ‘애학투련’ 결성을 시도한다. 그 집회 장소가 건국대였다. 그런데 이 애학투련의 결성을 기다린 건 자민투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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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천봉쇄가 일상이던 시절 이상하게도 경찰은 학생들의 건대 진입을 막지 않았다. 10월 28일 오전 7시부터 녹색 제복의 ‘안드로메다 군단’ 전경들이 배치돼 있었지만 출입은 지극히 자유로웠고 학생증 검사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물이었다. 멋모르고 들어온 물고기들을 가득 채운 후 한 번에 쑥 들어올려 만선을 노래하기 위한 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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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까지 마음 푸근하게 치르고 집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던 시간, 경찰은 행동을 개시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건국대학교를 들이친 것이다. 대경실색한 학생들은 학생회관과 단과대 건물로 쫓겨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지만 준비 없는 농성의 끝은 뻔했다. 대학생들이 홑겹 잠바로 10월 말의 한기를 버티며 초코파이 하나를 수십 명이 나눠 먹던 10월 30일, 정부는 저 유명한 ‘금강산 댐 공사를 통한 북한 수공 음모’를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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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빌딩 반이 잠기고 국회의사당이 그 돔 지붕만 남기고 물에 찰랑이는 모습을 그림으로, 미니어처로 보여 주는 가운데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은 높아졌고 정부는 10월 31일 건국대학교 각 건물에 있던 학생들을 강제진압, 체포한 뒤 무려 1288명을 구속시켰다. 말이 1288명이지, 이들을 조사할 경찰서조차 북새통을 이룰 정도의 사상 최대 구속 사태였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거창한 이름이 붙는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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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 그대로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1986년에서 198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그렇게 추웠다. 1288명을 빼앗긴 학생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또 이슈를 잡아 가두 투쟁을 나가면 시민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경찰에 넘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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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껏 그들을 위해 투쟁하노라 목울대 세우던 학생들이 ‘민중’들 발에 걸려 나동그라진 뒤 경찰에 끌려갔으니 그 심경도 어지간히 하수상했으리라. 그 겨울의 한복판에 박종철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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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인’으로서 끌려갔고 선배의 행방만 못이기는 체 불면 무사히 집에 돌아와 밥 잘 먹고 졸업 잘했을 서울대학생, 호주머니 털어 ‘도바리’ (수배 중 도피 행각의 은어)치는 선배에게 건네고 누나가 짜 준 목도리까지 걸어 주며 “형 추워 보여요.” 라고 웃던 그 착한 청년이 물지옥의 공포 속에 세상과 이별해야 했던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세상의 냉기는 더욱 곤두서는 듯 했으나 얼음장 속에서는 분노의 간헐천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게 쥔 주먹 속에서도 모래는 새어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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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개신교, 불교, 성공회 할 것 없이 종교인들의 뜨거운 현실 참여는 87년 6월을 달아오르게 만든 우둥불 (들이나 산에서 노숙을 할 때 지피는 불)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순간은 영화 <1987>에 등장하듯 1987년 5월 18일에 있었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고문경찰관 축소 조작 폭로 기자회견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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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천봉쇄된 속에서도 87년 6월을 열어젖힌 6.10 대회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치러졌고 6.10을 이끈 재야 인사들과 야당이 힘을 합친 국민운동본부는 향린교회 (영화에는 향림교회로 나오는)에서 발족했다. 언급했듯 부산의 시위 단골 장소는 도심 속의 절 대각사였다. 그러나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은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나왔다.
    1987년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렸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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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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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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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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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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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일어난 한 시위에서는 수십 명의 목사들이 길거리에 주저앉았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예수쟁이’들의 찬송가였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앞에 누가 서리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얻겠네.” 그래도 목사들이라 그런지 전경들이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 대신 사과탄을 터뜨리고 최루가루를 머리 위에서 뿌려 댔다. .
    그러나 목사들은 눈물콧물을 뿌리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목 놓아 악을 썼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얻겠네.” 불경한 말이겠으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예수는 박종철일 수도 있었다. 박종철은 무심히 일상을 살며 독재에 순응하던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나약함과 나태함에 묻혀 살던 수많은 ‘나’들을 각성시켰다. 종교인들이 그 앞에 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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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5월 23일 종로에서는 결사적인 연와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행진하거나 경찰과 싸우는 대신 날 잡아가라는 듯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데모하는 사람도 울고 지켜보는 이들도 눈물 흘리며 발 동동 굴렀던 가두시위가 벌어지던 바로 그날 오전, 종로구 연지동의 기독교회관에는 기나긴 이름의 모임이 열렸다.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범국민대회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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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규 목사, 송건호, 성래운 등 쟁쟁한 재야인사 134명이 모여들어 결정한 것은 “온국민의 분노를 현 정권에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해 오는 6월 10일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그날을 지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의 전당대회 날이었던 것이다. 육사 11기 동기였던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가 ‘임무 교대’를 공표하는 잔칫날, 대놓고 재를 뿌리겠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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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저래 6월 10일은 건곤일척, 불퇴전의 외나무다리가 돼 갔다.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가두투쟁 금지령’까지 내려졌다고 한다. 6월 10일을 위해 쓸데없는 ‘병력 손실’을 막자는 뜻이었다. 학교마다 교문 앞, 또는 광장 입구에 대문짝만한 숫자들이 날마다 교체됐다. “결전 5일전” “결전 4일전” 3일전..... 마침내 1일 전. 6월 9일. 그리고 6월 10일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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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의 이야기는 여기서 보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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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콘텐츠가 조회수가 1500인데 구독자가 하나도 안늘어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 ㅠㅠ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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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은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내일이면”.... One Day More를 부르짖은 날이었다. 6월항쟁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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