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

지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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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젠젠 본인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그녀의 글을 가장 많이 읽어 본 사람은 나일 것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문예부에서 만났으니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특별활동 시간에 처음 그녀의 글을 읽었으려나? 중학생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함께 글을 썼다. 교환일기부터 시작해서 장우혁 오빠에게 쓰는 러브장과 장우혁 오빠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 <무희록>까지. 러브레터를 왜 함께 썼는지는 모르겠다. 장우혁 오빠에게 보내려고 쓴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장우혁 오빠를 사랑하는지 서로에게 과시하기 위해 쓴 것 같기도... 장우혁 오빠가 등장하는 소설에는 우리도 등장했는데 어느 한 명이 오빠를 차지하는 일은 없어야 하므로 각자가 장우혁 오빠 다음으로 좋아하는 서브 남주를 등장시키고 그는 가질 수 없는 그분으로 남겨두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우리가 함께 쓴 소설 중에는 판타지물 말고 공포물도 있었다. 공포소설을 쓸 때는 뭔가 심오해 보이는 단어에 심취해서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소설에 사용할 말들을 고르곤 했는데, 그러다가 발견한 '설광'이라는 단어가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의 빛이 아닌 얼굴에 붙어 있는 두 눈의 빛인 줄 알고 멋지다고 적어 놨다가 소설에 썼다. 이 설광이 그 설광이 아니라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고 알게 되었다. 너무 부끄럽다... 세상에. 눈 설, 빛 광, 모르냐! 중학교 때 한문 배우지 않나. 우리 공부도 제법 잘했는데...

젠젠은 국문과에 진학하여 더 다양한 글을 썼다. 젠젠이 처음 쓰고 연극 동아리 무대에 올린 희곡 <앨리스와 리코더>도 아마 내가 제일 먼저 읽었을 것이다. 뉴스에서 본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대학 문학공모전에 출품하여 당선된 단편소설도 쓰이기 이전부터 그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다가 쓰인 순간 읽었다. 그러고 보니 현대시 수업시간에 썼다는 시 <잿빛 인생>은 읽지는 못했고 시간이 지나 직접 낭송하는 걸 들었다. (동영상 있음)


좋아하는 것이 글쓰기와 여행인데 그 두 가지를 언제나 함께 했다. 사랑하는 일 두 가지를 열심히 한 결과로 <한 달쯤 라다크>가 나왔다. <한 달쯤 라다크>를 쓸 때는 우리 둘 다 장우혁 오빠가 등장하는 소설을 쓸 때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정말 행복했다. 이후에도 열심히 여행하고 열심히 쓰고 싶었다. 즐겁게 쓰자, 매일 쓰자, 계속 쓰자, 얼마나 많은 다짐의 말들이 우리 입에서 쏟아져 나왔는지. 그런데 글을 쓰는 일이 너무 좋으면서도, 죽도록 괴롭고, 마음을 비우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도대체 글쓰기를 통해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을 이루려고 그러는지 글을 쓸 때마다 마음도 머리도 무거워져서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아래로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가라앉는 와중에도 떠오르려고 열심히 발장구를 쳐 보기도 했지만, 각자 다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시에 떠오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함께 하다 보니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쓰려고 하면 겹치는 것이 많았다. 우리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뛰어넘어야 할 벽이 되었다. 언제나,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 온 우리에게는 서로에게 소개할 각자의 세계를 구축할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가 떠난 여행은 그런 의미였다. 젠젠은 크루즈를 타고 서쪽으로, 나는 앞으로 앞으로 동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써 내려 가야 할 세계가 훨씬 늘어났다.

문예부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 두 꼬맹이가, 장우혁 오빠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을 함께 쓰던 두 여중생이, 성인이 되어 함께 세계를 쏘다니다가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을 또 함께 쓰고, 그다음이 무엇인지 몰라 울며불며 한참 헤매다가, 용기를 내어 반대 방향으로 각자의 여행을 떠나고, 그 끝에는, 함께 했을 때만큼이나 멋진, 서로에게 들려줄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만들어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제는 작가와 편집자가 되어 다시 만났다. 작가 젠젠의 초고를 처음 읽는 영광을 평생 누렸으니, 그녀의 글을 엮어 책으로 만들 기회도 당연히 내게 왔다.

젠젠이 <어쩌다, 크루즈>를 통해 보여주는 이 낯선 세계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배낭을 지고 땅 위의 국경을 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바닷길의 풍경이, 시공간의 세트장이 통째로 옮겨지고 있는 듯한 새로운 여행의 방식이, 무척 신선하고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이기도 했다. 글과 사진을 통해 젠젠의 여행을 따라가는 동안 크루즈 여행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어쩌면 크루즈 여행이란 은퇴한 노부부들의 전유물이 아닌, 배낭여행, 오지여행, 세계일주, 한 달 살기 등을 이을 새로운 여행 트렌드가 될지도. 머지않은 미래에 말이다.


젠젠과 나는 지난 20년 동안 이야기로 가득한 풍요로운 땅을 함께 일구고 그 아래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고 튼튼한 뿌리를 내려두었다. 이제 그것만 믿고 자유롭게 뻗어 나가면 된다. 멋대로 자라나면 된다. 젠젠에게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난다고 한다. <어쩌다, 크루즈> 최종 원고를 내게 넘기자마자 다음에는 무엇을 쓸 것인지 줄줄 늘어놓았다.

나는 앞으로 그녀가 써 내려 갈 글들을 여전히 제일 먼저 읽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 도사님이 말한 대로 조앤롤링 같은, 아니 그를 뛰어넘는 작가가 될 때까지, 젠젠의 많은 글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는 편집자로 남을 것이다.

막막하고 두려웠을 낯선 여행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 젠젠의 용기 있는 이야기가 담긴 이 책 <어쩌다, 크루즈>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라며.

그리고 도서출판 춘자의 다음 책이 될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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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문예부때부터 친구라니 앤이랑 다이아나같아요!

저 울었어요......춘자 편집자님 손에서 더 탐스럽게 여문 글과 책이 되리라 믿습니다 :)

전세계 유명 크루즈 여객선 운항업체들이 거의 도산 직전이에요... 이리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제 이 책은 미래 사람들에게 '전설 속의 크루즈 여행'을 기록한 성스러운 보물같은 책이 될 지도 몰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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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는 막연하게 크루즈 여행이 새로운 여행판을 열 수도 있겠다 하고 있었는데 디제이님 말처럼 미래 사람들에게 전설로 회자되는 여행으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책임감이 막 느껴지네요? 젠젠님의 멋진 기록을 책으로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