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의 글쓰기 휴양(Writing Retreat), 발리

9개월 전

image



 1년 간의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가 끝났다. 아침 7시 비행기라 새벽 3시 30분에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자잘한 생필품은 기부하거나 싼 값에 팔았는데 아직 텐트와 침낭, 자동차를 팔지 못한 것이다! 온라인 장터에 올리고 기다리고 또 올리고 기다리고,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날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하루 종일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뉴질랜드 관광이 비수기에 접어들어 더욱 수요가 없는 모양이다. 자동차 매매상은 '차악의 선택지'로 남겨두었다. 그들은 우리가 처음 구매했던 가격의 6분의 1을 제시했고 아주 완강하고 온화한 태도로 볼보 V40을 날름 가져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애써 봤자 우리에게 오게 될 것입니다. 아님 말고요.' 대자본의 무자비한 여유가 전해지는 듯하다.


 거의 포기하려 마음 먹었을 때쯤, 친한 동생이 주변 지인들 중 마침 차가 필요했던 분을 소개해주었다. 희망이 보였지만 늦은 밤 시간에 약속이 잡혀 매매상들과의 만남은 줄줄이 취소할 수밖에 없다. 저녁을 먹어야 했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밥 생각도 나지 않고 온몸에 힘이 없다. 만약 차를 팔지 못하고 떠나게 되면? 그것도 주차 공간도 넉넉지 않은 오클랜드 시티에서? 이것이 바로 '최악의 선택지'다.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생기겠지. 평정심을 잃지 말자, 평정심을.


 너무나 극적으로 ─ 우리가 마지노선으로 예상한 가격이 구매 희망자님께도 잘 맞는다! 이미 밤 아홉 시가 넘어가고 있다. 좋은 인연이라는 생각에 숙소에 가서 텐트와 침낭 매트 세트, 고급 헤어 드라이어까지 선물로 다 드리기로 한다. 자동차를 넘겨 드리고 두두와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아파트 로비 소파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아무 생각도 안나, 손해가 적지는 않지만 정말 다행이야, 고생했어. 늦은 저녁으로 베지테리안 버거와 모스카토 한 잔을 마시며 하루 동안의 긴장감을 녹여낸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 일주일은 그렇게 막힘 없이 수월했는데 마지막은 출국 몇 시간 전까지도 롤러코스터급으로 스펙터클하다. 새벽 3시 30분까지 밤을 새우려고 했지만 새벽 2시에 기절하고 말았다. 1시간 반을 자고 공항으로 출발한다.


 워킹 홀리데이가 끝났지만 한국이 아니라 '발리'로 간다. 지난 4개월 동안 일을 하고 체력을 다지는 데 집중했기에 두두는 서핑이, 나는 글쓰기가 절실한 상태였다. 한국으로 바로 가면 가족과도 시간을 보내야 하고 새로운 일을 구해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기에 또 다시 시간을 확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워킹 홀리데이의 끝에 한 달간 공백을 마련한 것이다.



글쓰기 휴양(Writing Retreat)이란?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 여행 기간 동안 원하는 프로젝트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것처럼 똑같이 경비를 마련하고 날짜와 숙소를 정하지만, 여행자가 아닌 작업가로서 떠나는 휴양이다. 나는 한 달 동안 지난 3월 31일에 끝난 '뉴질랜드 비파사나 명상 10일 코스'에 대해 남긴 기록을 글과 그림으로 옮기고, 뮤지션 지인이 요청한 앨범 아트 작업을 하고, 그동안 밀린 6개월 간의 뉴질랜드 여행기를 써낼 생각이다.

글쓰기 휴양을 위해 갖추어야 할 요건:

  • 중심가에서 벗어나 소음이 적고 고요한 숙소
  • 공간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는 숙소
  • 의자와 테이블
  • 무제한 무료 와이파이
  • 글에 대한 열망
  • 어느 곳에서든 랩탑이나 다이어리를 열 수 있는 마음
  • (저렴한 물가!)



 


발리에 마련된 기록자의 공간
Pondok Umalas, Canggu, Bali, Indonesia / ⓒchaelinjane, 2019




발리에서의 글쓰기 휴양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숙소는 우말라스 뚜논 길에 있는 '폰독 우말라스' 빌라다. 폰독은 '집'을 의미한다. 출입문을 열면 작은 정원과 부채꼴 모양의 작은 풀장이 보인다. 보통은 두두의 도날드 타카야마 롱보드를 눕혀 놓는다. 세 걸음 정도 걸어가면 거실로 들어갈 수 있고 풀장 안쪽 뒤로 더 걸어가면 샤워장과 화장실이 나온다. 1층 거실에는 ㄴ자 모양의 소파와 나무 테이블, 나무의자가, 계단을 올라가면 2층의 작은 다락방에 모기장이 잘 쳐진 푹신한 침대가 놓여 있다. 계단 있는 곳 위쪽에 에어컨이 있어 시원한 바람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1층으로 소복이 쌓인다. 지붕은 야자나무 풀의 일종인 알랑알랑(Alang Alang)으로 만들어져 천장을 올려다보면 마치 나무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전체적으로 흙과 나무, 돌로 지어진 집이라 묵직한 느낌이 안정감을 주고 색감도 아늑하다. 한 달 동안 빌리니 50% 할인 정책이 적용되어 1053 NZD(한화 약 74만 원)가 들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둘이서 플랫으로 방 하나 빌려서 한 달 지내는 것과 비슷한 가격이다.





바투볼롱 해변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짬뿌르 식당.
20k - 35k 루피로 푸짐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Warung Sika, Canggu, Bali, Indonesia / ⓒchaelinjane, 2019



 글쓰기 휴양을 위한 요건에 (저렴한 물가!)라고 써 놓은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뉴질랜드의 살인적인 물가 속에서 지내는 데 질렸기 때문이다. 바투볼롱 해변에서 바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파인애플 주스를 시키면 자리값이 더해져 밥 한 그릇 가격이 나온다. 그게 얼마냐면, 30k 루피. 한화로 3천 원이 조금 안 된다! 해운대나 기장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면 얼마일까. 적어도 8-9천 원은 내야 할 것이다. 뉴질랜드는 굳이 바다가 보이지 않더라도 6-7천 원은 든다. 거의 매끼를 나시 짬뿌르(Nasi Campur)라는 발리식으로 먹는데 밥 한 공기 가득에 좋아하는 반찬들 이것저것 다 받아먹어도 한 끼에 3-4천 원이면 오케이. 더 저렴한 곳은 2천 원도 안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같은 음식에 6-7천 원 정도. 셰프가 해주는 고급 해산물 요리도 만 원 안으로 즐길 수 있다. 이러니 발리의 저렴한 물가가 감사할 수밖에!


휴양에서 빠질 수 없는 건강 챙기기 ─ 명상, 요가





Pranava Yoga, Canggu, Bali, Indonesia / ⓒchaelinjane, 2019



 발리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매일매일 아쉽지 않게 충분한 작업량을 뽑아내고 있다. 아침 시간에 올인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그날 하루의 성과를 좌우한다. 발리는 상점이나 집이나 전체적으로 조명이 그렇게 밝지 않아서 아침에도 커튼을 열고 외부 햇볕을 더해야 충분히 밝다. 해가 지고 나면 글을 쓰기보다는 전자책으로 책을 읽거나 보고 싶은 영화로 영감을 채우는 편이 낫다. 뉴질랜드에서 10일 동안 비파사나 명상 수련을 했을 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더니 발리에 와서도 이른 새벽에 잘 일어나고 있다. 두두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홀로 작업하기에는 이른 새벽부터 오전 11시까지가 최적이다.


 스무 살 때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보고 흠뻑 빠져서 스틸컷을 인쇄해 다이어리에 붙여 놓은 적이 있다. 줄리아 로버츠가 숲 속의 오두막 같은 곳에서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촬영 장소가 바로 발리 우붓이었다. 어른이 되면 꼭 가서 나도 자연을 느끼며 명상할 거야,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발리로 왔다. 이곳으로 오기 며칠 전에 뉴질랜드에서 비파사나 명상을 배웠던 게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30분이라도 하고서 작업을 시작하면 무척 상쾌하게 하루를 열 수 있다. 정식으로는 아침저녁으로 1시간씩 수련을 해야 하니 남은 3주는 좀 더 마음을 굳건히 먹고 수련을 이어가 봐야겠다. 여기서 해내지 못하면 한국에서도 해내지 못할 테니까.



Pranava Yoga, Canggu, Bali, Indonesia / ⓒchaelinjane, 2019



 발리는 요가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프라나바 요가원이라는 곳으로 정해서 수업을 받아보고 12개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쿠폰을 구매했다. 1인당 10만 원 정도. 첫 수업은 플라잉 요가로도 많이 알려진 안티 그래비티 요가였는데 멀미가 심한 나는 거꾸로 매달리는 동작이 계속되어서 결국 그날 하루 종일 속이 좋지 않아 고생을 했었다. 그래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으니 걱정 없다. 선라이즈 플로우 요가, 아쉬탕가 요가, 빈야사 플로우 요가 수업을 매일매일 이어갔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올라올 때마다 아직은 경미한 현기증을 느낀다. 그렇지만 땀을 후드득 흘리며 한 시간 반 동안 열심히 따라 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진한 성취감이 가득 해진다. 지금은 몸 상태로 인해 일주일 정도 쉬고 있는 상태. 다시 컨디션을 회복하면 기쁘게 수련을 이어갈 생각이다.




창조적인 여행의 즐거움




 워킹 홀리데이로 장기 여행을 떠나면서 처음으로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일상에서 툭 떼어낸 특별한 하루'가 아닌 또 하나의 온전한 일상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여행을 가면 3박 4일이 대부분이었고 길어봤자 2주가 전부였기에 여행지의 하루하루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적으면 어쩔 수 없다. '푹 쉴 거야!' 다짐해도 봐야할 것들이 있기에 관광하는 여행이 되기 쉽다. 4일 동안 그 동네의 마음에 드는 카페 몇 곳에만 앉아 있다 온다고 생각해보면, 물론 그래도 괜찮지만 나는 아무리 카페에 앉아 글이 쓰고 싶어도 비행기 티켓값이 아까워서 몸을 일으켜 부지런히 움직일 것 같다. 그런데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 상대적으로 여행지에서의 하루에 대한 중압감이 줄어든다. '작업 - 식사 - 외출 - 작업 - 저녁 식사 - 마무리' 등의 개인적인 일상 체계가 있다면 새로운 곳에서 그 체계를 그대로 풀어낼 수도 있다. 이 일상 체계는 여행을 넘어서 내가 바라는 삶의 뼈대다. 현실은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하는 데 맞춰 일상을 디자인해야 하지만, 언젠가는 바라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꿈꾸는 일상을 직접 살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아등바등 부여잡고 느리더라도 천천히 전문성을 갖춰나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창조적인 여행을 통해 꿈꾸는 삶을 연습해볼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이런 면에서 여유를 획득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나아갔으면 좋겠다. 뉴질랜드에서 일할 때 좋은 점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구분이 약하고 누구든 일정 기간을 일하면 일정한 유급 휴가를 법적으로 보장 받는다는 것이었다. 함께 뉴질랜드에서 일했던 동료 언니도 지금 한 달 휴가를 받아 발리에 와 있다. 나는 직장을 포기하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떠나온 것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무리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일과 일상의 스위치가 변환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삶에 다양성이 마련되어야 타인의 다양성도 진정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생길 것이다.


 혹시나 당신도 삶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느낀다면, 당신의 다음 여행은 다양한 가능성으로 잠재력을 실험해볼 수 있는 시간으로 가득 차기를! 당연히 해외가 아니라도 상관 없다. 다만 당신이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와 그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보기를. 그리고 그 일과 함께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다이어리의 발리 여행 첫 페이지
Pondok Umalas, Canggu, Bali, Indonesia / ⓒchaelinjane, 2019





│by @chaelinjane





여행지 정보
● Canggu, Badung Regency, Bali, Indonesia



기록자의 글쓰기 휴양(Writing Retreat), 발리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image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dclick-imagead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TEEMKR.COM IS SPONSORED BY
ADVERTISEMENT
Sort Order:  trending

글쓰기 여행에서 어떤 글들이 나올지 기대되네요. 발리에 여행갔을 때 캉구에 이틀 정도 머문적이 있어서 더 반갑네요. :)

·

몽상가p님-! 이제는 잘 써보겠다는 욕심보다 충실히 써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답니다 :-)) 너무 많은 날들 동안 글을 써 부치지 못했네요. ㅠㅠ 힘내서 충실히 써내겠습니다-!!!!! 리스팀 응원까지 ㅠㅠ 감사드려요 -! :))

저도 오래전 호주워홀자로 생활을 했었거든요.
뉴질랜드를 못간게 아직도 아쉽네요.

비파사나명상에 깨달음과 앞으로에 요가수행으로 훨신더 평안하고 행복해 지시길 응원합니다 . 두리님 ^^

Om~~~~~~~

·

~ OM SHANTI SHANTI SHANTI OM ~
엇 저는 뉴질랜드워홀자로 호주를 못 간 케이스랍니닿ㅎㅎㅎ
발리 오면서 하늘에서 슬쩍 보았는데 호주가 얼마나 거대한 땅덩어리인 지 실감을 했어요 ㅎㅎㅎㅎ :)
수련 열심히 해서 스스로에게, 가족에게, 주변에 좋은 영혼이고 싶어요. :)))
곤님의 응원 너무 감사드려요!!!!

꼭 발리 가봐야 하는데 ... 언제 가볼까요 ^^.
잘 읽었습니다.

·

ㅎㅎ 감사합니다-! 여행이라는 게, 어쩌면 돈보다 시간이 가장 큰 문제지요. :)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글 사이에 사진을 넣어두니, 사진들이 마치 매그넘에 실린 것 같아요!

너무 많지 않은 사진과 자세하게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노력이 많지 않아서 좋습니다.

·

퐁당님 - ! 크으 사진 갯수 절제해서 올린 것과 간결하게 적으려고 노력한 점 알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매그넘이라니 이런 영광이 ㅠㅠㅠㅠㅠ 계속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

인생의 최고의 시기를 보네고 계신것 같습니다.
일하고 쉬고 글쓰고 요가를 배우고~
저는 젊어서 인생을 알았어야 하는데 이제야 인생을 알게 되어서 조금은 ~~
좋은 인생 만드세용!

·

히마판 님은 이미 충분히 열정적인 삶을 살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
돈과 시간을 어디에다 소비해야 하는지 좀 더 깨어 있는 눈으로 판단하려해요 ㅎ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그 응원 히마판 님께도 그대로 전달할래요 ㅎㅎㅎ 화이팅!!!!

·
·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한 이웃분의 추천으로 jcar토큰보팅합니다.

남기신 메모 : OM SHANTI SHANTI SHANTI

·

으아 :) 너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