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과 절망의 사이 / Day 2

9개월 전





사적인 파라다이스를 위한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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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Day Vipassana Meditation Course│Day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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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과 절망의 사이 / ⓒchaelinjane, 2019




새벽과 아침




 어제는 보름달이 떴다. 천장 쪽에 있는 작은 창문 안으로 환한 달이 쏙 들어왔는데, 강렬한 빛 때문에 자정 즈음에 잠깐 깼다. 누군가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는 것 같이 직접적이었지만 불쾌하지 않고 신비로웠다. 사진으로 담고 싶었지만 피로가 몰려와 계속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창문 안에 달이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늘은 새벽 4시 5분에 일어났다. 아랫 입술 안쪽에 뭔가 있어서 혀끝으로 쓸어보니 물집 같은 게 나있다. 설마 구순염인가? 피곤한 느낌이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10일 내내 없어지지 않으면 곤란할 텐데.


 4시반-6시반 명상은 여전히 졸음과의 전쟁이다. 중간중간 무릎을 세워 다리를 풀어주지 않고 가부좌로 두 시간을 버텨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며 온전히 2시간을 쓰는 건 갓난아기 때 말고는 이번 10일이 처음인 것 같다.


 구순염까지 돋으니 문득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기로 한다. 보겔 토스트 2개에 버터 듬뿍, 잼 한 스푼, 그리고 끓인 오트밀에 두유와 시리얼, 씨앗, 복숭아 요거트, 바나나를 얹어서 타임(Thyme) 티 한 잔과 함께 먹는다. 오늘도 25분이 걸린다. 서둘러 샤워까지 마쳤다. 배가 조금씩 아픈데 아직은 낯선 환경이라 용변이 나올 생각을 않는다.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리면 되겠지. 오전 7시 26분, 방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 벽 너머로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8시까지 나도 짧은 잠을 자야겠다.


 오전 8시-9시 단체 명상 때 관찰해보니 다리가 조금씩 덜 저리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잠은 쏟아진다. 고엔카 선생님의 중간 지도 말씀을 듣고 방으로 돌아온다. 새로 온 수련생들은 끝없이 호흡을 감지하고 숨이 닿는 지점을 느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저녁 강의 때 새로운 명상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길고 지루한 호흡 관찰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어떻게 더 깊은 의식으로 내려갈 수 있는 걸까. 아직까지는 의식이 잠과 딴생각 사이로 새어나가기 바쁘다. 메디테이션 홀을 나오니 산 위의 나무들 사이로 아침빛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 펼쳐진다. 아, 사진 찍고 싶다. 그렇지만 두 눈에 이 장면을 꾹꾹 담아내는 수밖에 없다.


 오전 9시-11시 명상을 방에서 하기로 한다. 잠들지 않기 위해 눕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낸다. 안 좋은 기억부터 해서 특별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안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절망의 감정이,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갈망의 감정이 생긴다. 절망과 갈망, 이 두 감정 모두가 고통을 만들어낸다. 두 감정으로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호흡으로 돌아오기 위해 애를 쓴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언제나 변함없이 내 곁에 존재해온 것이 바로 호흡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숨을 아무렇게나 쉬며 살았던 것 같다.


 11시에 먹는 점심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점점 다채로워지는 베지테리안 식단에 매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늘은 두부와 깨, 콩소스가 버무려진 쌀국수 샐러드와 밥, 삶은 양배추와 삶은 당근, 여러 채소가 섞인 샐러드에 씨앗과 검은깨 소스를 뿌려 함께 먹는다. 채소 본연의 맛으로도 이렇게 풍족한 식감의 식사를 할 수 있다니. 후식으로 브라우니까지 나와서 입이 황홀한 점심이었다. 브라우니, 브라우니, 브라우니...! 눈가가 촉촉해질 것만 같다. 감초 차는 엄청 달다. 한 그릇 더 먹을까 싶었는데 눈치가 보여 쌀국수 샐러드만 더 받아왔다. 내일부터는 부담 갖지 말고 밥을 크-게 한 주걱 떠야지. 산책 나가면서 사진을 찍고 싶다. 그동안 당연했던 욕망도 꾹 참아야 한다.







 수련자의 숲에 간다. 중간 길목에 보이는 큰 야자수에 누군가 'I WAS HERE'이라고 적어 놓았다. 반대쪽과 맞은 편 나무에도 이름과 글자들이 여러 개 새겨져 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여전히 숲에 남아 생생하다. 그들은 며칠째에 이런 흔적들을 남겼을까. '명상'이라고 하면 푹 쉬는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아니다. 이건 정말로 수련이다. 돈 주고 마사지 받으며 누워 있는 스파 같은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곳에서 평소와는 시간이 다르게 가는 것 같아도,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간은 변함 없는 속도로 흐르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내 인생의 고작 10일이겠지만 겨우 이틀째인 오늘은, 3월 31일이라는 날짜가 멀게만 느껴진다. 두두는 무얼하고 있을까. 두두가 보고 싶다. 숲길 끝까지 가면 나오는 고인 물을 '생각의 웅덩이'라 부르기로 한다. 너무 오래 머무르면 벌레에게 물릴 수도 있으므로(윙윙거리는 벌 소리가 숙소에서부터 숲 안에까지 요란하다) 생각은 짧게 끝내기로 한다.


 오후 3시 30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에 구름이 심상치 않아 미리 널어두었던 수건과 옷을 안으로 들였는데 햇볕이 조금 나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내린다. 2시 반-3시 반 명상 때는 호흡 소리가 일정해지고 몰입이 잘 되는 듯했지만 중간에 기침을 하거나 코를 푸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마음을 잡는 게 잘 안된다. '완벽한 정적'은 존재하기 힘들다. 주위의 소음들과 갑작스러운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처음으로 빗소리와 함께 명상을 한다.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5시 차 휴식까지 마음을 다잡고 명상에 임하기로 한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것도 체력 소모가 상당했는데 12시간 동안 명상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저녁




 어제처럼 사과·바나나 한 개씩과 루이보스 차 한 잔을 마신다. 밀크티로 한 잔 더 마실까 했지만 충분히 배가 부르니 욕심내지 않기로 한다. 예전에 루이보스 차를 마셔본 적이 있었던가. 익숙하고도 낯선 느낌, 참 맛있다. 여기서 마셔서 더 그럴까.


 이곳에서 나는 숲의 나무들처럼 정해진 대로 순응하며 가만히 지내고 있다. 먹고, 자고, 뜨거운 물로 샤워까지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영광인가. 1시간만 더 명상하고 나면 새로운 강론을 듣는다. 새로운 이야기가 얼른 나를 뒤흔들어주었으면 좋겠다. 10일 120시간의 명상을 잘 해내고 지금 하는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과 화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오후 5시 36분이다.


오후 7시에 시작한 Day 2 강론이 오후 8시 50분이 되어서야 끝난다. 한국어 버전을 녹음하신 분이 고엔카 선생님의 말씀을 문법 강의하듯 너무 세세하게 해설까지 덧붙여 설명해주어서 다른 나라 수련자들보다 30-40분은 더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 강론이 마칠 때까지 다이닝 홀에 앉아 있다가 메디테이션 홀로 돌아가서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 하루 동안은 윗입술과 코 끝, 코 안쪽의 삼각형 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 알아채고, 그 외의 부위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은 무시하는 훈련을 할 예정이다. 갑자기 어딘가 가려운 곳이 있어도 '가렵구나'하고 참아내야 한다. 아주 작은 부위에 마음을 민감하게 집중시킴으로써 불건전한 감정들을 무시하고 가라앉히는 법을 연습한다. 넷째날에는 지혜의 장으로 넘어간다는데, 비파사나 명상 코스가 생각보다 이론과 수련이 잘 짜여 있어서 신기하다. 갈망과 절망, 그 사이의 평정심을 터득하기 위해 내일도 열심히 수련에 임해야지. 여기서 배우는 담마가 나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하루도 감사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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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파라다이스를 위한 수련 기록

Day 0
Day 1





│by @chaelinjane


여행지 정보
● Dhamma Medini Vipassana Meditation Centre Burnside Road, Makarau, New Zealand



갈망과 절망의 사이/ Day 2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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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코박봇 입니다.
업보트 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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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행적들~
시시각각 변하는 과정을 일일이 알아채가는 과정을 그리 느끼시면 얼마나 생각이 비워져야 할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떤 변화도 잘 못 느끼고 그져 힘이 들기만 하더군요.
가끔 명상을 하는 저는 딱 한번 느껴본 세상에 대한 감사를 다시 들어가 보려고 해도 재 진입이ㅡ안되더군요. 역시 꾸준한 수련을 통하여 드나듦이 자유로와야 하는데 무었이 나를 누르는지도 모른체 오늘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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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마판님...! 쉬는 시간 때마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아주 미세하게 경험한 부분까지 다 잊어버릴 것 같더라고요. 너무 소중한 시간들이라- 할 수 있는 집중력을 다해 메모를 해두었어요. 비파사나 명상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글을 쓴 만큼 실제 명상에는 100퍼센트 온 힘을 다 쏟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저도 변화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아주 작고 미묘한 변화라도 감지되면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기에 '음- 이건가?' 하면서 부담 없이 넘겨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나요. ㅎㅎㅎ 아주 힘들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네요 정말. :)

이런 명상 코스가 있군요. 다음 시리즈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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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Vipassana가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 같아 글을 써보기로 했어요. :)

그림이 인상적이예요. 그림을 보면, 명상을 잘 하셨다는 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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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감사합니다 인석님 ㅎㅎㅎㅎㅎ 그날그날 느낀 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매번 고민하고 있어요 :-)))

2시간 가부좌 명상이라니!!
저는 20분이 한계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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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2시간 전체는 아직 버겁습니다 ㅠㅠ 그래도 똑바로 앉아 있으려 노력하니 구부정한 자세가 예전보다 많이 고쳐졌어요! 신기합니다 :))))